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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지만 프로젝트가 수정되면 Sourceree에서 커밋을 해줘야 git에 업데이트가 된다. 


 

 

History에는 git에 올라가 있는 파일들을 확인할 수 있고 개발 내용을 볼 수 있다.

이런 개발을 커밋해 주는 부분이 파일 상태이다. 파일 상태를 눌러서 현재 파일에서 추가되거나 수정된 파일들을 스테이지에 올려주고 개발작업(변경사항, 추가사항 등)에 대해 커밋 메시지를 남겨 커밋해 주면 된다.

 

커밋해 주기 전에 항상 Pull을 받아두는 습관을 가져야 하는데, 이유는 Pull을 안 받고 올렸다가 꼬이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작업하기 전에 Pull 받고 작업하고 Commit 하고 Pull(사이에 또 누군가가 작업해서 올려두었을 수 있음)하고 Push.

 

 

 

commit과 push와 pull에 대해 알아보자.

 

Commit
Commit이란?
- 변경된 부분을 저장소에 기록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게임에서 save 파일 같은 거랄까) 변경된 부분을 포인트로 기록해 두는 느낌.
- Commit을 해두면 변경사항이 계속 쌓여도 Commit 포인트로 되돌릴 수 있다.
(코드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문제를 직감했을 때, 그냥 돌아가는게 정신에 도움이 될 때 과감하게 돌아가서 다시 작업하는 게 나을 때가 있다.)

변경한 부분이나 수정한 부분을 스테이지에 올려두고 커밋 메세지를 남겨 커밋을 해준 다음, Push 해주면 git에 업데이트된다.
++
여러 개의 작업을 해주고 Commit을 해줄 때에는 한 번에 다 올리지 말고 작업 내용에 따라서 분리시켜 커밋해 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 문제가 터졌거나, 변경사항이나 추가 구현 부분에 대해 편하게 찾을 수 있다. 
커밋 메세지는 최대한 깔끔하고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적어주는 게 좋다.
내용이 길어진다 싶으면 제목과 내용을 분리해서 줄 나눠 넣어주자.

 

 

Pull
Pull이란?
- 간단하게 Git에 새롭게 업데이트된 내용이 있으면 받아오는 것.
- 저장소에 올라와 있는 커밋이 내 프로젝트에 반영되어있지 않을 때, pull을 눌러주면 커밋되어 있는 변경사항이나 수정사항이 적용된다.

 

 

Push
Push란?
- 업로드시키는 것과 같다. 커밋을 한 작업을 저장소에 올려두는 것.

 

 

 

이렇게만 놓고 보면 세상 간단한 건데 충돌이 발생하면 머리가 아프다.

회사에서 작업하다 충돌 나면 누가 작업한 걸 살릴지도 고민하게 되고, 날리게 되면 다시 작업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충돌 나기 전에 미리 스테이지에 올릴 때 자신이 작업한 게 아닌데 뭔가 수정되어 있다고 떠 있을 땐 파일 변경 사항 폐기 버튼을 눌러서 미리 쓸데없는 충돌을 방지하자.

제거 버튼이 아니다. 파일 변경사항 폐기 버튼이다. 위아래로 있어서 조심해야 됨.

 

 

++ 소스트리 구역 이름들

 

 

commit 할 파일들이 working Copy에 있고 스테이지에 올리기(add)해주면 index(== staging area)에 올라가게 되고 staging area에 올라와 있는 파일들만 커밋 내용과 함께 commit 시켜주면 index에 있는 파일들만 저장소로 커밋이 됨.

working copy에서 스테이지에 올리기를 해주지 않은 파일들은 저장소에 커밋되지 않고 내 프로젝트에만 남아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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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전 관리 시스템 == 버전 컨트롤 시스템 == 형상 관리 == 소스 관리
기능의 개선, 버그의 수정 등 변화를 관리하는 것을 의미함.

 

 

여러 종류의 버전관리 시스템들이 있고, 이들을 쉽게 사용 가능하게 해주는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나는 버전관리 시스템으로 Git을 사용하고, SourceTree를 사용한다.

우선 Git을 설치하고, SourceTree를 설치해서 사용해 보자.

 

Git 설치 
: 여기서 자신의 컴퓨터에 맞게 git을 설치해 주자.

https://git-scm.com/book/ko/v2/%EC%8B%9C%EC%9E%91%ED%95%98%EA%B8%B0-Git-%EC%84%A4%EC%B9%98

 

Git - Git 설치

이 책은 Git 2.0.0 버전을 기준으로 썼다. 대부분의 명령어는 그 이전 버전에서도 잘 동작하지만, 몇 가지 기능은 아예 없거나 미묘하게 다를 수 있다. Git의 하위 호환성은 정말 훌륭하기 때문에 2.0

git-scm.com

 

SourceTree 설치

https://www.sourcetreeapp.com/

 

Sourcetree | Free Git GUI for Mac and Windows

A Git GUI that offers a visual representation of your repositories. Sourcetree is a free Git client for Windows and Mac.

www.sourcetreeapp.com

 

다 설치했다면 저장소를 만들어보자.

 

+ 버튼을 눌러서 Clone을 할지 Add를 할지, Create를 할지 선택해 주면 된다.

Create를 해주고 싶다 경로와 이름을 설정해서 생성해 주면 되고,

협업을 할 때는 보통 github에서 Clone 해줄 프로젝트의 HTTPS URL을 가져와서 Clone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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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티가 업데이트되면서 main Camera의 stack에 새로운 카메라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카메라의 출력을 레이어링하여 하나의 결합된 출력을 만들 수 있는 기능이다.

이걸 사용하면 하나의 씬에서 여러 개의 카메라를 관리해 줄 수 있으니 사용해 보자.

나의 경우는 하나의 씬에서 프리팹화 시켜둔 미니 게임 여러 개를 불러오게 하려고 시작했다.

 

< 스택 설정 방법 >
Base Camera 설정 :
- 메인 카메라의 Render Type을 "Base"로 설정.
- Stack 섹션에서 오버레이 카메라들을 추가 가능.
Overlay Camera 설정 :
- 새 카메라 생성 후 Render Type을 "Overlay"로 변경.
- Culling Mask를 통해 렌더링 할 레이어 지정.

 

위에서 정리해 둔 것처럼 설정해 보자.

 

1. 우선 기본 main Camera의 Render Type을 Base로 바꿔 준다.

 

 

2. 추가해주고 싶은 Camera의 Render Type을 Overlay로 바꿔 준다.

++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부분, 추가하는 Camera의 Tag을 MainCamera로 남겨두지 말자.

++ Audio Listener도 꺼주거나 지워주자.

 

 

3. 코드에서 카메라 등록 해주고 싶은 부분에 써야 할 부분.

베이스 카메라의 스택에 오버레이 카메라 추가.

 

 

4. 코드에서 카메라 제거 해주고 싶은 부분에 써야 할 부분.

추가해줬던 카메라 제거.

 

 

예외처리 해서 최종 작업한 스크립트
using System.Collections;
using System.Collections.Generic;
using UnityEngine;
using UnityEngine.Rendering.Universal;

public class CameraManager : MonoBehaviour
{
    private Camera baseCamera;
    private Dictionary<string, Camera> cameras = new Dictionary<string, Camera>();

    private void Awake()
    {
        baseCamera = Camera.main;
    }

    public void RegisterCamera(string miniGameId, Camera overlayCamera)
    {
        if (!cameras.ContainsKey(miniGameId))
        {
            cameras.Add(miniGameId, overlayCamera);
            var cameraData = baseCamera.GetUniversalAdditionalCameraData();
            cameraData.cameraStack.Add(overlayCamera);
        }
    }

    public void UnregisterCamera(string miniGameId)
    {
        // miniGameId가 null이거나 비어있는지 체크
        if (string.IsNullOrEmpty(miniGameId))
        {
            Debug.LogWarning("MiniGame ID is null or empty");
            return;
        }
        
        // 카메라 딕셔너리에서 해당 ID의 카메라를 찾음
        if (cameras.TryGetValue(miniGameId, out Camera camera))
        {
            // 베이스 카메라가 존재하고 카메라가 유효한지 확인
            if (baseCamera != null && camera != null && camera.gameObject != null)
            {
                try
                {
                    var cameraData = baseCamera.GetUniversalAdditionalCameraData();
                    if (cameraData != null && cameraData.cameraStack.Contains(camera))
                    {
                        cameraData.cameraStack.Remove(camera);
                    }
                }
                catch (MissingReferenceException e)
                {
                    Debug.LogWarning($"Camera reference was already destroyed: {e.Message}");
                }
            }
            
            // 딕셔너리에서 카메라 제거
            cameras.Remove(miniGameId);
        }
    }
    
    private void OnDestroy()
    {
        // 카메라 스택 정리
        if (cameras != null)
        {
            foreach(var camera in cameras.Values)
            {
                if (camera != null && baseCamera != null)
                {
                    var cameraData = baseCamera.GetUniversalAdditionalCameraData();
                    if (cameraData != null)
                    {
                        cameraData.cameraStack.Remove(camera);
                    }
                }
            }
            cameras.Clear();
        }
    }
}

 

++ baseCamera 가 null 이 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면 null 체크도 해줘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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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혁의 "장례 희망"이라는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최근에 들었던 노래들 중 가장 신선하게 느껴졌다.
노래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세상에 감정을 거래하는 시장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여러 감정들이 상품화되어 감정을 사고 팔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기쁨의 감정을 구매해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한 감정들은 정량화되어 마트에서 판매되지만 복잡한 감정들은 직접 사고팔 수 있는 비공식적 감정마켓에서 판매한다. 실시간으로 가격이 변동되며, 감정이 가지고 있는 복잡함의 수치에 따라 가치가 조정된다. 얼마큼의 희소성을 가진 감정인지, 지속되는 시간은 어느 정도 인지도 중요하게 인식된다. 공식적인 시장에서는 감정을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들이지 않지만 수요가 많아지면 판매를 중지하거나 가격을 상승시킨다. 비공식적인 시장에서는 수요도가 높아지면 당연하게도 경매로 진행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불량품이 없을까? 일상이 너무 힘들어 기쁨을 샀는데 통이 바뀌어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만큼 우울한 상황이 또 있을 까.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심정이라니. 국가는 이런 불똥을 방지하기 위해 소량의 샘플 감정을 함께 붙여두었다. 어느 정도의 해결점이 되었다.
 
물론 비공식적인 마켓에서는 샘플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상품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또 생각해 볼 내용이 있다. 감정의 품질을 평가하는 직업이다. 비공식적인 마켓에서는 감정이 비싼 값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텐데, 그 정도의 가치를 내고 구매한 감정이 가짜라면 마켓의 신뢰도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감정의 품질을 관리해 주는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런 품질을 관리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도 1 + 1처럼 보증 스티커 또한 존재할 것이고, 사람들은 아마 돈을 더 주고서라도 감정의 겉면에 붙어있는 "정 품. 이 감정을 100% 보증함." 뭐 이런 무지개처럼 빛나는 스티커를 찾아 구매할 것이다.  
 
감정의 유통기한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내가 생각하기엔 어느 정도의 감정이 압축되어 만들어있는지가 중요하게 적용할 것 같다. 감정의 강도랄까. 비교적으로 일상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얇은 감정들에 대해서는 유통기한 또한 한 해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에 느껴보지 못할 정도의 감정이라면 유통기한 또한 10년이 될 수도, 100년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아마 사람들은 이 유통기한을 통해 투자를 하는 투자자 또한 존재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100년이 지난 어느 날 100년 전의 감정은 꽤나 흥미롭게 평가될 수 있으니까. 예를 들어 만약 나폴레옹이 대패를 했던 날의 감정이 담긴 감정통이 있다면 누구나 구매욕구가 엄청날 것 같지 않은가?
 
여기서 생각해 볼 내용은 한 가지 더 있다. 과연 감정은 구매자의 상대적인 수치를 채워줄 수 있는가. 하지만 판매자로서 그 수치를 생각해 봐야 되나도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내 생각엔 기쁨 1000g이 아닌 기쁨 1000원이 맞는 것 같다. 기쁨을 1000원어치 구매한 사람이 1000원어치의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재구매를 할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여기서 중독이란 단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약물 중독처럼 감정도 중독이 될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마 판매하기 전에 필수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고려사항이 될 것이다. 기쁨의 중독, 슬픔의 중독. 정신과 의사들이 벌써부터 바빠질 게 눈에 선하다.
 
감정이 판매되고 구매되면 감정은 판매자의 감정이 되는 것일까, 구매한 나의 감정이 되는 것일까.
"여기는 스위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새소리가 들리면서 선선한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때의 기쁨." 1000원.
이 감정을 산다면 이건 나에게 그대로 전이되는 것일까.
아마도 이 부분은 감정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따라 고민할 것 같다.  긍정적인 감정이라면 전이되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은데, 부정적인 감정이라면 감당할 자신이 과연 있을까.
긍정의 감정이라면 저 반대편 세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집안에서 느낄 수 있으니 정말 행복할 것 같은데. 부정적인 감정은, 그저 슬픈 영화 한 편을 봤을 때 느끼는 슬픔의 감정 정도로만 느끼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은가. 부정의 감정도 전이가 된다면 약간 악용돼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겠는걸.
 
감정이 판매가 된다면 세계적으로 강시장이 되는 나라는 어디일까. 아마도 각 나라마다 선호되어 판매되는 감정들도 다양할 것이다. 가장 행복한 나라로 뽑히는 나라에서 판매하는 기쁨은 보증된 기쁨의 감정이라 명품처럼 비싸게 직구될 수도 있다. 전쟁, 식량부족 등의 어려운 나라에서는 슬픔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쏟아질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상황에서 경험하지 못할 감정들을 구매하는데 일말의 도덕성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부정적인 감정들을 판매하는 비용으로 얻은 수익은 자신들의 나라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유네스코에서 대신 판매를 해주려나.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다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일상의 감정을 구매할까?
과연 그들의 감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할까.
감정이 판매가 가능해진다면 추출하는 것도 가능해질 테니 사람들에게서 부정적인 감정이나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감정들에 대해서 추출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때 느꼈던 내 감정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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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이라 12월 31일이 되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사실 난 예배보다 집 가기 전 뽑는 올해의 말씀카드에 기대가 더 크다. 한해의 말씀 카드를 뽑고 난 후엔 우리 가족은 무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단골인 우동집을 간다. 
엄마는 야식 먹는걸 안 좋아하시지만 이날만큼은 예외다. 아마도 이 루틴의 첫 시작은 큰 이모부가 데려가 주신 가락국수집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너무 어렸을 때는 교회에 가도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이모네 집에 데려다 두고 교회에 가셨다. 깜깜한 밤길을 지나 그 새벽에 왜 장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혼자만 불 켜진 우동집에서 먹었던 우동의 맛이란.  
 
우리가 가는 우동집은 아주 아주 작은 우동집이다. 테이블이 기껏해야 4개 정도. 그래서 빠르게 가야 한다. 까딱하다가 줄을 서서 기다려야 되기 때문이다. 맛은 사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맛집은 아니다. 아마도 모두가 추억을 먹으러 오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그 조그만 우동집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 그곳에 계신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외치면 아주머니는 내가 문을 열어재낀 것 보다도 더 활짝 웃어주신다. 자리에 앉으면 그때 부터 마치 올해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데 난 그 기분이 좋다. 자연스럽게 우동 4개를 시키고 이내 우리 뒤로 줄줄이 손님들이 가득 차는 상황을 본다. 빨리 먹고 빨리 빠져 줘야 하는 것도 이곳의 매력. 12월 31일이 갓 지난 1월 1일 새벽에, 바로 나온 우동 4개와 단무지를 함께 먹고 있으면 마치 산 정상에서 먹는 라면보다 맛있게 느껴진다. 다 먹고 난 뒤 빠르게 뒷정리를 하고 나오면서 다시 한번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외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을 때 이 길로 바다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죽는 줄 알았다. 식곤증과 피로가 마취총에 맞은 것처럼 핑핑 돌게 만들더라. 졸음 쉼터가 왜 있는지 그때 알았다. 물론 도착해서 봤던 바다의 풍경은 장관이었지만.ㅋㅋㅋ 다시는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단 생각을 4명이 동시에 느꼈다.
 
이걸 왜 쓰고 있냐면 내가 먹은 우동을 자랑하고 싶어서랄까. 아니면 sns에서 떠도는 1월 1일 루틴 중에 엄청나게 빡센 루틴을 가진 집(무려 낮잠 자기가 루틴에 포함되어 있던 집.)을 봐서 그런가. 그냥 써본다. 
 
그리고 우동집 아주머니가 돈 많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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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집에 상실의 시대라는 책이 있었다. 웬 사람의 실루엣만이 있는 뭐랄까 그 당시엔 약간의 음침한 기분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당시에 내 나이는 꽤 어렸고 그때도 역시나 재미없는 책에 대해 읽는 것을 싫어했던 나였기에 초반부 정도까지 읽고 더 이상 읽지 않았던 책으로 기억된다. 
 
최근 어느 서점에 가도 초록색과 빨간색의 껍데기에 덮여진채로 한 곳 전체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집에 이 책이 있다는 것을 까먹고 노르웨이의 숲으로 다시 사온 나의 가족 덕에 서재에서 찾아볼 필요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필요도 없었다.
 
1월 1일이 된 날, 오늘은 이 책을 다 읽어 보겠노라 마음먹고 책장을 펼쳤다. 
역시나 나이가 들고 다시 선택한 책이라 해서 나에게 다른 감정으로 다가올 리 없는 책이었다.
처음 80쪽까지는 여전히 흥미가 없었고 반절정도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의문을 남겼고, 마지막까지 도달했을 때는 첫 장에서 나왔던 그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의 친구들과 다를 바 없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 길을 잃은 줄 알았을 것이다.
 
주인공 근처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어린 나이의 주인공에게 아마도 이 부분의 무게는 꽤 크게 다가왔을 것이라 생각된다. 주인공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비슷한 듯 다른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주인공보다 더 불안정한 상태이다. 서로가 처음 사건이 일어났던 그 순간 이후로 두 번 다시 안 봤다면 이 책의 이야기는 달라졌을 까.
둘은 서로를 의지하고 슬픔을 잊으려는 듯 노력하며 세상을 산다. 그리고 서로를, 어쩌면 한쪽에서는 사랑이라 인지한다.
과연 그들은 사랑이었을 까. 내가 생각하기엔 소중했던 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서 생긴 비어있는 감정이 가져다준 불안정감 같다. 안정적이지 않기에 서로를 의지하고 그렇기에 더 소중한 느낌. 난 사실 이 책의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보다는 상실의 시대가 더 어울린다 생각한다. 마치 책의 제목처럼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 같았으니까.
 
나오코는 슬픈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소중하게 생각했을 사람을 둘이나 잃었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가장 불안정한 사람으로 나온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토록 불안정한 생각을 하는 것일까. 감정에 파도같이 쓸려 자신을 가두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 사람의 주변 인물들은 행복하려 해도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 단정 지었다.(이후에 나오는 레이코를 통해 나오코라는 사람으로 치유를 얻은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꽤나 노력을 하지만 결국 그녀는 삶을 살아가기보다 삶의 일부인 죽음을 선택한다. 레이코에게 옷을 주겠다는 쪽지 하나만을 남긴 채 그녀는 떠났다. 나오코는 레이코가 삶을 살아가길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살아갈 때 입을 옷을 남긴 게 아닐까. 확실히 나오코는 레이코에게 치유를 주었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보다는 강한 사람이다. 살아가기 위해 답을 찾고 극복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그의 룸메이트인 특공대 이야기가 나온다. 와타나베는 자신의 유머를 위해 거리낌 없이 룸메이트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지 사람을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소재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쾌했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특공대에게 어디선가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을 가졌다. 와타나베는 스스로가 나가사와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 둘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여자와 관계를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게 바로 청춘이다 뭐 그런 느낌의 하루키의 생각이 담겨 있는 것 같았지만, 둘 다 사랑 없이 관계를 하는 부분에서 별다른 문제를 못 찾는다.(이후에는 찾게 되는 것 같지만.) 이것저것 생각하면 더 있겠지만 와타나베가 단점만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에게도 장점이 있다. 나는 불안정한 사람에 대해 사실 쉽게 놓을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꽤 빠르게 스며들기에 나였다면 나오코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뒤로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에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녀의 언니, 그녀의 남자친구 기즈키처럼 그녀를 두고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곁에 없을 때도 시시콜콜한 자신의 모든 이야기들을 편지로 보낸다. 나오코에게 끊임없이 삶에 대해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책내용은 와타나베의 편지 내용과 함께 그날그날의 기록처럼 쓰여 있다. 그래서 다른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은 오로지 내가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이 책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한다. 그저 남아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다 다르게 살아갈 뿐이다. 
이 책을 읽는 중에 기즈키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는 왜 죽기 전에 "오늘은 지기 싫었거든."을 말했을 까. 지극히 일상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한낱 게임에서 그러지 말고, 진짜 필요했을 자신한테나 지지 말지.
죽음에게 가로채이기 전에 지지 말고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어쩌면 이 책에서 나오는 몇몇의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오코의 생각도 궁금했다.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참 이기적이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거라면, 기억은 커녕 그저 희미한 존재로 향의 연기 처럼 사라졌어야 됐을 것 같다.
맞다. 솔직히 나는 이 커플이 싫다.
 
나는 이 책이 필독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글귀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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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여러 연말 약속을 지나 어느덧 2024년의 마지막 하루가 되었다.

2024년이 되었을 때도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발만 내딛으면 2025년이 된다니.

2024년에는 꽤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러시아 전쟁에 참전한 북한 병사의 이야기들이나, 며칠 전 일어난 항공기 추락 사고라던지. 공평하게 흘러가고 있을 시간에서도 공평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어렸을 때는 이런 사고 소식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왜 잊혀질 때쯤 하나씩 참사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만큼의 뉴스를 보지 않아서 였을까. 철렁거리는 마음이 익숙하지 않다.

 

나이가 든다는 게 어떤 면에서 보면 축복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해지는 감정으로 와닿는다. 아마도 이기심이 불러오는 감정일 것이라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경계선이 뚜렷했다. 봄에는 벚꽃을 보러 가고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러 계곡이나, 빠지, 워터파크, 그것도 다 할 때쯤 바다로 여행을 갔다. 가을에는 한강으로 피크닉도 가고, 날씨가 좋으니 친구들과 어디든 여행을 다녔고, 겨울엔 스키장으로 여행 계획을 짰었다. 이빨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운 한파에도 친구들이랑 털모자를 눌러쓰며 즐거웠던 시간을 보냈었다.

20대가 지나 30대가 돼 보니 이제 친구들도, 나도 너무 바쁘다. 20대에는 공부만 하면 나머지는 다 놀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30대에는 놀 시간을 만들기 위해 꽤나 노력이 필요했다. 더 이상의 계절에 따른 감성은 내 인생에서 사라지고 있다. 옛말에 젊을 때 더 많이 놀아야 된다는 말이 이제는 퍽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어렸을 적에 해 질 녘까지 친구들과 신나게 놀이터에서 놀다가 배고파질 때쯤 집으로 들어갈 때의 기분을 기억하는 가. 나의 10대와 20대는 아마도 놀이터에서 놀던 그때의 꼬마였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친구들과의 시간이 줄었다면,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늘었다. 어쩌면 엄마, 아빠는 내가 친구들과 다 놀다 오길 기다려 준 것 같다.

부모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꽤 즐겁다. 나이에 따른 충고도 가끔 들을 기회가 있는데 최근에는 살짝 무서운 말을 들었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시간은 아무렇지 않지만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는 시간은 꽤나 힘들다는 것을. 아직 시간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알지 못하니, 사실 두렵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간이 흐르기에 나이가 드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고, 그렇기에 나 또한 늙어가는 게 당연한 건데 피터팬 증후군이라도 걸린 것인지 요즘 들어 참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감정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비옥한 토양이 쌓이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숲이 되고, 땅에 있는 수분이 다 뺏기면 아무것도 살지 않는 사막이 될 수 있듯이 감정이 쌓이면 그게 나의 얼굴이 된다. 내 얼굴에는 내가 쌓아 뒀던 감정을 머금고 있다. 가끔 거울을 본다. 내 무표정에 인색함이 있지 않은 지, 내가 웃을 때는 어떤 얼굴인지 관찰한다. 주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체크해봐야 한다. 무관심 또한 조절할 필요성이 있다. 사실상 조금이라도 귀찮아진다 싶으면 무관심해지는 게 더 심해졌달까. 내가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무관심이 당연해진다면 나 또한 그들의 기억 속에 무의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감정에 모든 것들을 품을 수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명체가 숨 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 장점 중 하나로 오래 걷기가 있다. 2만 보도 걸으니 걷는 건 자신이 있었다. 물론 믿는 구석이 있었다. 표지판. 표지판만 보면 어디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기에 난 새로운 길에서도 내 체력만 되면 그냥 걷는 것을 좋아했다.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누군가가 만들어 둔 표지판이 있지만 인생에는 그 표지판을 내가 만들어야 한다.

어디인지도 모른 채로 익숙하게 너무 많이 걸은 것이 문제였을까. 길이 안 보인다.

어렸을 때와, 나이가 들어 길을 잃는 게 다른 것 같다. 뭐 랄까. 어두움의 깊이가 다른 것 같달까. 검정에도 다 같은 검정이 아니듯 내가 걸어온 길이만큼 더 깊고 더 진해진다. 어쩌면 사실 표지판이 있는데 내가 있는 곳이 너무 어두운 것일까도 생각해 봤었다. 근데 그렇게만 생각하면 너무 슬프기만 하니까 그만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왜 어둠도 시간이 지나면 눈이 적응을 한다 하지 않는가. 슬슬 보일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내년엔 더 좋은 일들이 생길 것 같다.

그런 거 보면 엄마, 아빠는 얼마 큼의 어두움에 적응한 것일 까?   

 

2025년에는 올해보다, 지금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자. 더 많은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제 진짜 곧 지나갈 2024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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