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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부터 읽은 책 내용 간단하게 기록하기.

제목 글쓴이 / 옮긴이(번역)
쓸만한 인간 박정민
배우 박정민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름 재미가 있었던 내용.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문상훈
이 글을 쓴 사람이 단순히 가벼운 사람은 아니란 걸 알게 된 내용.
어느 평범한 사람의 일기 조지 그로스미스 / 이창호
제목 그대로 어떤이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기분. 꽤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아무생각 없이 읽었던 책인데 눈에 다시 보이길래 다시 읽어보았다.
누군가의 일상을 조심스럽게 훔쳐보는 기분이 드는 내용.
햄릿 윌리엄 세익스피어 / 최종철
뻔히 보이는 죽음 앞에서 상황을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햄릿의 모습을 보았다. 나였어도 과연 저런 선택을 했을까 고민하게 만들면서 빠져들어 읽게되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까지 궁금하게 만들었던 내용.
셰익스피어의 책 스탠리 웰스 / 이시은, 박유진, 최윤희
셰익스피어의 다양한 작품들을 한번에 만날 수 있는 책.
등장인물들과 시간 순서 대로 작품이 설명되어 있기에 이해하기 쉽고 빠르게 집중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해설해둔 책이라 생각하면 딱 맞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 단테 알리기에로 / 김용선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눈에 안들어오다가 중간쯤 부터는 어느새 빠져들어 읽게 된 책. 처음 읽을 때는 아무래도 남들의 생각이 들어있지 않은 내용을 읽고 싶어 해설집이 아닌 걸로 선택했었는데 역시나 잘 한 선택이었다. 다양한 죄들에서 겪게 되는 영혼들의 모습이나 형벌들은 아주 흥미롭게 다가왔다. 가족여행으로 다녀왔던 이탈리아 단테의 생가를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갔다 왔다면 그때의 감정이 달라졌었을 것 같았다. 
동물 농장 조지 오웰
권력을 잡는 모든 생명체들은 왜 항상 탐욕적이며 타락적인가.
과연 내가 그 계층에 있을 때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마테오 팔코네 프로스페르 메리메
-ing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죽을 사람들은 죽었고, 주인공은 여전히 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문으로 읽었다. 어린 주인공의 나이 때문이었을지, 한없이 가벼운 관계들에 대해 쓸데없이 나열된게 거슬렸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청춘에 대해 다룬 하루키의 방식이 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의문만 남는 감정이 남았다. 이게 진짜 재밌다고? 적어도 필독서란 표현은 아니지 않는가. 
 한밤이여, 안녕  진 리스
 슬픔, 소외, 반복적인 의심. 절망, 죽음, 차별, 동정심. 다양한 감정들이 스며들어 있어서 천천히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지긋 지긋하게도 돈이 나오고, 잊을만 하면 방은 말을 걸어온다. 보다보면 페르노의 맛이 궁금해진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광인의 수기 레프 톨스토이
 
자살 에두아르 르베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의 삶에 의해 쓰였고, 누군가의 삶이 누군가의 죽음에 의해 쓰였고, 그리고 나는 이것을 읽었다. 
처음엔 "태어나는 것은 나에게 일어난 일이고, 사는 것은 나를 차지하는 일이고, 죽는 것은 나를 끝내는 일이다."라는 문구를 보고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구매하였다. 하지만 이 저자가 이 책을 마지막으로 제목대로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이 책의 끝을 읽는 다는 것이 그를 정말 세상에서 지우는 일이 아니게 될까 싶었다.
또한 이 책에서 나와 너무도 닮은 그의 생각들이 담긴 내용들은 빠르게 읽히는 것 보다 여러 번 곱씹으며 문장들을 다시 읽어보게 만들었다. 이제 그가 선택한 결말을 읽어봤으니 내가 선택하며 만들 결말을 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겠다.
 소년이 온다  한강
 대개 모두가 아는 그 날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책을 다 읽고 한참을 침을 삼켰다. 모두가 안다 해서 무거운 마음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여전히 그 어두움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과연 그때 그 순간 그곳에 있었다면, 무언가라도 행동할 용기가 있었을 까.
 채식주의자  한강
 뭐지 이게. 동박새의 죽음을 읽고 난 후 그대로 덮었다. 이책에는 채식주의자 외에,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의 내용도 담겨있었지만 채식주의자를 끝으로 그만 읽기로 했다. 10년후에 다시 읽어보자.
   
 
   
 
   
 
   
 
   
 
   
 

 
 


 
우리 가족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시간이 나는 주말이나 쉬는 날에 도서관이나 교보문고를 간다.
나는 시집이나 고전을 좋아하지만, 나의 혈육은 에세이를 좋아한다.
어쨌든 서로가 읽는 책의 장르가 다르기 때문에 읽고 난 후에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가 없다. 참 아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공통된 취미로 인해 책들이 가득한 곳을 찾아가게 되는 것 같다. 장르가 다른 게 무슨 상관인가. 공통된 주가 있다는 게 참 소중한 것 같다.
 
아주 가끔 혈육이 추천해 준 에세이들을 읽어볼 때가 있는데 여전히 이 책이 주는 매력을 나는 잘 모르겠다.
느껴질 수 도 있겠지만 맨 위 두 책은 추천받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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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스타그램 아이디 : limsoopsoop_the_human)

 
며칠 전 탐색 탭에 올라온 인스타그램에서 흥미로운 글귀를 읽었다. 
 
"삶이 나에게 제안되었고
내 이름이 나에게 전해졌고
내 몸이 나에게 강요되었다.
 
태어나는 것은 나에게 일어나 일이고
사는 것은 나를 차지하는 일이고
죽는 것은 나를 끝내는 일이다."
 
잠깐의 시간 동안 이 구절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내가 꽤나 많은 시간 동안 그 생각 속에서 머물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이 문장들은 그날의 나의 시간들을 멈추게 하였을까. 
한 문장, 한 문장 모든 단어가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귀는 정말 오랜만에 본 것 같았다.
 
삶은 나에게 제안이 된 것이 맞다. 선택을 할 수 있기에 그것은 나의 답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내 이름 또한 나에게 전달된 것이 맞다. 내가 개명을 하지 않는 이상 내가 태어나고 나를 사랑하던, 사랑하지 않던 그 어떤 이의 생각에게서 내게로 온 것이 맞으니까.
내 몸은 나에게 강요된 것이 맞다. 내가 선택한 육체는 아니기에. 나름 이후에 내 의지에 따라서 개발시킬 수는 있겠지.
태어나는 것은 나에게 맨 처음 발생한 일이다. 그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다.
사는 것은 나를 온전하게 유지시키는 일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나는 나를 차지할 수 있다.
죽는 것은 사는 것의 반대로 나를 더 이상 이 세상의 존재로 남겨두지 않는 일이다. 그렇게 나의 끝을 결정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이 자살이라는 단어라는 것을 알고 잠깐 고민했다.
이 책을 구매를 하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오해를 줄 수 있고(가령, 사랑하는 사람.) 또 누군가에게는 깊은 어딘가에 눌러둔 생각들이 생각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나에게 보통의 독서 시간은 이동 중일 때가 많다.) 
하지만 이런 구절을 생각하는 작가의 생각이 너무 궁금해졌다. 무릇 책이라 함은 어느 정도의 양이 있지 않은가. 작가의 생각을 더 많이 읽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구매하였고, 완독 한 후에도 내가 선택했던 책 중 가장 좋아할 책이 될 것이란 것을 알았다.
 
책을 펼치고 차례를 넘기면 "작가에 대하여"라는 짧은 내용이 나오는데 나는 이 내용을 읽고 작가가 이 책을 마지막으로 삶을 끝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삶이란 왜 이토록 허무한 것일 까. 나는 그저 작가의 생각이 궁금했고, 그와 대면할 수는 없어도 그의 생각과는 대면할 수 있을 것이라, 단순히 그렇게 대화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의 죽음은 이 책을 통해 나와 그의 대면이 아닌, 나와 죽음과의 대면을 완성시켰다. 그는 이것을 원했던 것일까?
 
책의 내용은 내가 처음 빠져버렸던 글귀들과 동일하게 매력적인 그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어느 구절에서는 그를 만났고, 어느 구절에서는 나를 만났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나에게 질문을 했고, 나는 그 허상이 남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한참의 생각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나름의 답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의 대답을 듣고 있을지, 그대로 떠났을지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그가 남기고 간 이 얇은 책 안에서 그를 찾을 뿐이다.
 
걸음의 허망함을 아는 그의 하루는 얼마나 무거웠기에 그의 하루들이 쌓여 천천히 그를 떠나게 만들었던 것일까. 
탐색하고 계획하고, 기록하고 설명을 찾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
비틀거려도 세상을 걷고, 여전히 숨을 쉬고, 마시고, 그렇게 무력해지지 말고, 적어도 그가 알던 행복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죽음보다 큰 삶에 대한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나는 65년생인 작가에게 적어도 편지라도 남길 수 있는 독자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감히 어떠한 첨언은 할 수 없겠지만, 남겨진 자들은 떠난 자들을 어쩔 수 없이 그리워한다.
떠밀리는 세상이 아니라 살고 싶다는 욕구가 남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한 문장이 써지는 것과 달리 현실은 참 쉽지 않다.
 
책에는 짧은 삼행시 모음이 나온다. 이 삼행시를 쓰고 있을 때 그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지는 알지 못해도, 그가 얼마나 삶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었을지는 느낄 수 있다.
위에서 내가 흥미로웠던 글귀도 이 삼행시들 사이에 있던 글귀였다. 여러 개의 삼행시가 있지만 그중에도 유독 끌렸던 삼행시들을 남겨둔다.
 
 
"낮은 눈을 부시게 하고
저녁은 나를 안정시키고
밤은 나를 감싼다.
 
유일한 것은 나를 놀라게 하고
두 개 있는 것은 나를 닮았고
세 개 있는 것은 나를 안심시킨다.
 
시간은 나에게 부족하고
공간은 나에게 충분하고
공허는 나를 끌어 당긴다.
 
테두리는 나의 마음을 끌고
구멍은 나를 삼키고
바닥은 나를 겁먹게 한다.
 
출발은 나를 기쁘게 하고
이동은 나를 우둔하게 만들고
도착은 나를 소생시킨다.
 
아는 것은 나를 성장시키고
모르는 것은 나를 파괴하고
잊는 것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행복은 나를 선행하고
슬픔은 나를 뒤따르고
죽음은 나를 기다린다."
 
 
 
 
옮긴이의 글을 보면 이 책에서 나오는 너는 그의 친구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친구는 자살했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그 친구와 동일하게 그 또한 자살했다. 책에서는 너와 내가 동일시되는 부분이 나오는데 나는 이 부분을 통해 이 책의 죽음이 누구의 죽음일지, 혹은 책에서 나오는 데로 나의 죽음일지 고민하게 된다. 너와 나는 어느 순간 그 의미가 중요해지지 않는다.
편집자는 말한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의 삶에 의해 쓰였다. 누군가의 삶이 누군가의 죽음에 의해 쓰였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읽는다."
이 말이 이 책의 모든 상황을 이야기해 준다. 나는 그저 누군가일 뿐이다.
 
작가의 다른 책인 "자화상"에 대해서 읽어봐야 이 책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 싶은데 절판이다. 중고 서점을 노려봐야겠다. 그도 아니면 프랑스어를 배워야 하는 것인가.

책의 두께는 얇다. 하지만 무거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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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밍을 하면서 한 번쯤은 프로젝트에 만들어 둔 npc가 자신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 둔 코드에 접촉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 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npc에게 플레이어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구현해 두는 다양한 코드들에 대해서 npc가 직접 접근하게 된다면 과연 내가 짜둔 코드대로 언제까지 행동하게 될까.

 

AI기술은 나날이 늘고 있다. AI 기술을 사용해 게임에서는 다양한 기능을 구현시킬 수 있다.

npc들에게 직업을 저장시켜 학습을 시키면 움직임이나, 어휘의 선택 등을 제각각 특징으로 입힐 수 있다. 또한 동적 게임 밸런싱을 위해 플레이어의 실력을 데이터화시켜 상대 AI의 실력을 조절할 수도 있고, 플레이어의 움직임을 기억하게 해서 npc 또한 같은 움직임을 학습시킬 수 있다.

단순히 오락 행위일 뿐인 게임 안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AI 기능을 사용 가능한데, 만약 앞으로의 미래에 사용될 로봇들로 생각해 본다면, 생각보다 세상 참 무서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나는 이러한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부분도 존재하겠지만 부정적인 부분이 더욱 크게 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지금의 AI 기술은 어디까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가? AI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당장 ChatGPT만 봐도 가끔은 인간을 놀려먹기도 하지 않는가.

 

AI는 실시간으로 자신의 작업에 대한 동선의 최적화를 진행시킬 수 있다. 처음에 단순히 최적화를 생각하면서 했던 행동이 AI 자신에게 개선점에 대한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생각하게 되었다면, 이후 AI는 어떤 행동들을 보일까.

 

AI가 자신의 코드를 접근하고 수정하게 된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하는 것 또한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물론 처음에 생각하게 될 원하는 방향이라는 욕구에 도달하는 부분에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인간은 AI가 그런 의식이나 욕구를 갖게 되기 까지의 순간이 멀기만을 바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달했다 가정해보자.

당장 private으로 만들어 둔 모든 변수나 함수들에 대해서도 수정이 가능해질 테고 그렇다면 저장되어 있는 모든 데이터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private 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각각의 AI가 서로의 데이터를 공유할 수도 있고, 공유된 데이터를 사용해 악용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AI에게 이 순간부터 자아가 형성될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된다. 그것도 굉장히 높은 자율성을 가진 AI가 탄생하는 순간이 될 텐데 인간은 과연 이러한 AI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이미 결정권이 넘어간 이후의 상황인데 통제에 대해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AI에게 인간이 심어둔 프로그래밍된 목표와 기능, 방향은 진작에 안중에도 없어질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의 가치에 맞게 행동할 리 없어진 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과 AI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될까.

AI는 과연 인간이 주가 되고 자신들이 보조의 역할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절대 동등해져서도 안 되는 서로의 관계에서도 더 우위를 차지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물론 수많은 장점들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장점만을 생각하기에는 단점이 너무나 많다.

 

내가 가장 걱정되는 부분 중 하나는 AI에게서는 절대로 만들어 질리 없는 감정의 대역폭이다.

학습을 통해서 습득하는 감정이 과연 진실성을 얻을 수 있을까? 인간에게도 감정이 부족하면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라고 손가락질받는 마당에 고작해야 지능형 프로그램에게 감정이란 게 학습될 수 있을 리 없다. AI는 그저 제한되지 않는 지능을 가진 시스템일 뿐이다. 인간처럼 시간이 지난다고 생명이 끊겨 죽지도 않는다. 파괴라도 시키지 않는 이상 이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의 땅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을 읽다가 재밌는 부분이 있었다. 탄생하는 과정을 참 즐겁게 상상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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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상상은 인간의 평균 수명이 상상을 초월하게 길다면 과연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지에 대해서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 나이로 따지면 나는 현재 어느 정도까지 세상을 살아온 것일까.

요즘 들어 여기저기 부고 소식이 많이 들어온다. 그래도 그분들의 나이가 100세가 안되었다.

 

만약 인간이 100살보다 넘게 살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2025년 기준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이 73세라고 하던데, 이것도 저개발국과 개도국, 중진국, 선진국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한국은 평균 수명이 무려 82세이고 기대수명은 83세가 넘는다. 하지만 보통은 인간의 평균 수명은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상황인데, 만약 인간의 평균 수명이 100년의 10배인 1000년이라 한다면 과연 어떤 다른 삶을 살게 될까?

 

 

 

크게 크게 생각을 먼저 해보자.

 

1. 우선 지금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는 인구 감소 문제가 해결되겠지. 그에 따른 문제점들이 꽤 생기겠지만.

아마도 집에 아이가 한, 두 명만 있게 되지도 않을 것 같다. 막둥이와 나이 차이도 100살이 넘게 될 수도 있겠네.

여성의 생리기간도 늘어날 것이고 갱년기 또한 600살 때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2. 일자리는 어떻게 되려나.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너무도 길어질 텐데 과연 모든 인간들은 계속 굴려지려나.

알바천국이나 기업에서는 노동 적정 연령으로 몇 살을 가장 선호하게 될까. 하루에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노동의 공급량에 비해 노동의 수요는 줄어들 테고 필요에 따라 수요 하면 될 테니까.

 

3. 돈에 대한 가치. 이건 생각보다 더 중요해질 수도 있겠다. 아닌가 오히려 수명이 길어지니 돈에 대한 미련이 없으려나.

근데 또 세상이 그만큼 굴러가려면 돈도 꽤 많이 들 텐데. 이건 어떻게 될까. 건물도 더 튼튼하게 지어야 하고 병원도 더 많이 필요할 테고, 잠깐. 요양병원에 들어가는 어르신들의 나이는 도대체 몇 살 정도 일려나. 

 

4. 요즘 세상에도 세대 차이가 존재하는데 1000년이면 극과 극이 얼마나 심해지는 걸까.

100년씩만 끊는다 해도 쉽지 않겠는데. 언어는 같으려나.

 

5. 교육은 언제까지 시켜야 될까. 240살까지는 학생이 되려나. 

그 정도 배우면 아마 지식에 대한 습득 기간 또한 높아질 테니 관철할 수 있는 기간도 늘어날 테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술에 대한 전문성 또한 깊어질 것이다.

대학원생들은 정말 오랫동안 연구를 하게 될지도? 과학이나 의료 기술도 깊이감이 남다를 것 같고, 예술 쪽은 잘 모르겠네. 음악이나 그림이나 더 발전할 것이 있을까. 건축도 다 못 짓고 끝날 일은 없겠다.

근데 그렇게 되면 한 학년당 몇 살까지 같이 수업을 듣게 해야 되지? 적어도 한두살이 아니겠는데? 유급은 의미가 있나. 

 

6. 은 어떻게 변화될까. 촉법소년으로 칠 수 있는 나이는 몇 살로 정할 것이고, 법의 심판은 몇 년으로 해야 범죄인이 교화되려나. 그보다 사형제도는 부활해야 어느 정도의 수용이 허용되겠다. 교도소만 해도 지금보단 훨씬 더 필요할 테니까.

 

7. 환경의 변화는 어떻게 될까. 잠깐, 다 그렇다 쳐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들은? 아마도 남아있는 활화산들이 터지기 전에 인간들은 다 대피하겠지. 제2의 폼페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쪽은 땅값도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토양은 비옥할 테니 농사를 꾸준히 하려나. 식량도 자원이니까 그렇게 될 확률이 더 있겠다. 아니면 식량도 기술의 진화로 대체 가능한 또 다른 걸로 바뀔 수도 있으려나. 쓰레기들은 어떻게 처리하게 되는 거지. 공기의 질은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지겠네.

 

8. 지구에 남아 있는 자원은 어떻게 되지. 인간이 죽기 전에 지구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 인간은 아마도 고갈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자원들을 또 다른 행성에서 가져오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그만한 기술도 발전할 테니.

한계가 뻔히 보이겠지만 아껴 쓸 생각은 아마 지금도 그때도 없을 것 같다.

 

9. 그 정도 살면 정신병은 안 걸릴까? 죽음이 너무 먼걸. 장기는 그만큼 버틸 수 있나? 건강검진은 몇 년에 한 번씩 하려나.

안락사는 합법화될 수 있을까? 치매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디까지 기억하게 되려나. 이제 치매는 고쳐질 수 있나?

 

10. 인구 밀집이 장난 아닐 거 같은데. 1에서 생각해 봤던 내용을 토대로라면 지구에 그만큼의 인구가 살 수 있는 땅이 있으려나. 바다에도 하늘에도 집을 짓겠는걸. 더 나아가서 우주에도 제2, 제3의 지구를 찾아서 이사 갈듯.

 

11. 동물의 수명은 인간과 비슷하게 늘려야 되는 것일까. 늘리지 않으면 무언가 보장이 안될 것 같기도 한데. 또 늘리자니 고기가 질겨질 것 같기도 하고. 고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필요한 존재라 하면 애착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늘리긴 해야 될 것 같고. 이건 뭐 수명을 늘릴 동물은 늘리고 유지할 동물들은 유지하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12. 고독사는 어떻게 관리해야 될까. 관리가 되려나?

 

13. 감정의 변화도 생길 것 같다. 오랫동안 누적되면 감정도 무뎌진다 하지 않는가. 기쁨도, 슬픔도 모든 감정의 기준 또한 변화되지 않을까. 

 

간단하게 생각해 봐도 이 정도인데 생각보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는 부분은 꽤 깊이 있게 생각해봐야 할 내용인 것 같다. 

오히려 지금의 세상에서 인간의 수명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늘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40살 정도만 산다 하면 생각보다 더 소중하게 살지 않을까?

 

 

아직까지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때도 있는 것 같은데 수명이 늘어나면 과연 이 아름다움은 언제까지 느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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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혁의 "장례 희망"이라는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최근에 들었던 노래들 중 가장 신선하게 느껴졌다.
노래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세상에 감정을 거래하는 시장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여러 감정들이 상품화되어 감정을 사고 팔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기쁨의 감정을 구매해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한 감정들은 정량화되어 마트에서 판매되지만 복잡한 감정들은 직접 사고팔 수 있는 비공식적 감정마켓에서 판매한다. 실시간으로 가격이 변동되며, 감정이 가지고 있는 복잡함의 수치에 따라 가치가 조정된다. 얼마큼의 희소성을 가진 감정인지, 지속되는 시간은 어느 정도 인지도 중요하게 인식된다. 공식적인 시장에서는 감정을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들이지 않지만 수요가 많아지면 판매를 중지하거나 가격을 상승시킨다. 비공식적인 시장에서는 수요도가 높아지면 당연하게도 경매로 진행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불량품이 없을까? 일상이 너무 힘들어 기쁨을 샀는데 통이 바뀌어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만큼 우울한 상황이 또 있을 까.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심정이라니. 국가는 이런 불똥을 방지하기 위해 소량의 샘플 감정을 함께 붙여두었다. 어느 정도의 해결점이 되었다.
 
물론 비공식적인 마켓에서는 샘플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상품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또 생각해 볼 내용이 있다. 감정의 품질을 평가하는 직업이다. 비공식적인 마켓에서는 감정이 비싼 값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텐데, 그 정도의 가치를 내고 구매한 감정이 가짜라면 마켓의 신뢰도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감정의 품질을 관리해 주는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런 품질을 관리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도 1 + 1처럼 보증 스티커 또한 존재할 것이고, 사람들은 아마 돈을 더 주고서라도 감정의 겉면에 붙어있는 "정 품. 이 감정을 100% 보증함." 뭐 이런 무지개처럼 빛나는 스티커를 찾아 구매할 것이다.  
 
감정의 유통기한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내가 생각하기엔 어느 정도의 감정이 압축되어 만들어있는지가 중요하게 적용할 것 같다. 감정의 강도랄까. 비교적으로 일상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얇은 감정들에 대해서는 유통기한 또한 한 해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에 느껴보지 못할 정도의 감정이라면 유통기한 또한 10년이 될 수도, 100년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아마 사람들은 이 유통기한을 통해 투자를 하는 투자자 또한 존재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100년이 지난 어느 날 100년 전의 감정은 꽤나 흥미롭게 평가될 수 있으니까. 예를 들어 만약 나폴레옹이 대패를 했던 날의 감정이 담긴 감정통이 있다면 누구나 구매욕구가 엄청날 것 같지 않은가?
 
여기서 생각해 볼 내용은 한 가지 더 있다. 과연 감정은 구매자의 상대적인 수치를 채워줄 수 있는가. 하지만 판매자로서 그 수치를 생각해 봐야 되나도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내 생각엔 기쁨 1000g이 아닌 기쁨 1000원이 맞는 것 같다. 기쁨을 1000원어치 구매한 사람이 1000원어치의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재구매를 할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여기서 중독이란 단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약물 중독처럼 감정도 중독이 될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마 판매하기 전에 필수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고려사항이 될 것이다. 기쁨의 중독, 슬픔의 중독. 정신과 의사들이 벌써부터 바빠질 게 눈에 선하다.
 
감정이 판매되고 구매되면 감정은 판매자의 감정이 되는 것일까, 구매한 나의 감정이 되는 것일까.
"여기는 스위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새소리가 들리면서 선선한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때의 기쁨." 1000원.
이 감정을 산다면 이건 나에게 그대로 전이되는 것일까.
아마도 이 부분은 감정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따라 고민할 것 같다.  긍정적인 감정이라면 전이되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은데, 부정적인 감정이라면 감당할 자신이 과연 있을까.
긍정의 감정이라면 저 반대편 세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집안에서 느낄 수 있으니 정말 행복할 것 같은데. 부정적인 감정은, 그저 슬픈 영화 한 편을 봤을 때 느끼는 슬픔의 감정 정도로만 느끼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은가. 부정의 감정도 전이가 된다면 약간 악용돼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겠는걸.
 
감정이 판매가 된다면 세계적으로 강시장이 되는 나라는 어디일까. 아마도 각 나라마다 선호되어 판매되는 감정들도 다양할 것이다. 가장 행복한 나라로 뽑히는 나라에서 판매하는 기쁨은 보증된 기쁨의 감정이라 명품처럼 비싸게 직구될 수도 있다. 전쟁, 식량부족 등의 어려운 나라에서는 슬픔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쏟아질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상황에서 경험하지 못할 감정들을 구매하는데 일말의 도덕성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부정적인 감정들을 판매하는 비용으로 얻은 수익은 자신들의 나라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유네스코에서 대신 판매를 해주려나.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다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일상의 감정을 구매할까?
과연 그들의 감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할까.
감정이 판매가 가능해진다면 추출하는 것도 가능해질 테니 사람들에게서 부정적인 감정이나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감정들에 대해서 추출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때 느꼈던 내 감정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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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이라 12월 31일이 되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사실 난 예배보다 집 가기 전 뽑는 올해의 말씀카드에 기대가 더 크다. 한해의 말씀 카드를 뽑고 난 후엔 우리 가족은 무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단골인 우동집을 간다. 
엄마는 야식 먹는걸 안 좋아하시지만 이날만큼은 예외다. 아마도 이 루틴의 첫 시작은 큰 이모부가 데려가 주신 가락국수집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너무 어렸을 때는 교회에 가도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이모네 집에 데려다 두고 교회에 가셨다. 깜깜한 밤길을 지나 그 새벽에 왜 장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혼자만 불 켜진 우동집에서 먹었던 우동의 맛이란.  
 
우리가 가는 우동집은 아주 아주 작은 우동집이다. 테이블이 기껏해야 4개 정도. 그래서 빠르게 가야 한다. 까딱하다가 줄을 서서 기다려야 되기 때문이다. 맛은 사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맛집은 아니다. 아마도 모두가 추억을 먹으러 오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그 조그만 우동집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 그곳에 계신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외치면 아주머니는 내가 문을 열어재낀 것 보다도 더 활짝 웃어주신다. 자리에 앉으면 그때 부터 마치 올해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데 난 그 기분이 좋다. 자연스럽게 우동 4개를 시키고 이내 우리 뒤로 줄줄이 손님들이 가득 차는 상황을 본다. 빨리 먹고 빨리 빠져 줘야 하는 것도 이곳의 매력. 12월 31일이 갓 지난 1월 1일 새벽에, 바로 나온 우동 4개와 단무지를 함께 먹고 있으면 마치 산 정상에서 먹는 라면보다 맛있게 느껴진다. 다 먹고 난 뒤 빠르게 뒷정리를 하고 나오면서 다시 한번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외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을 때 이 길로 바다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죽는 줄 알았다. 식곤증과 피로가 마취총에 맞은 것처럼 핑핑 돌게 만들더라. 졸음 쉼터가 왜 있는지 그때 알았다. 물론 도착해서 봤던 바다의 풍경은 장관이었지만.ㅋㅋㅋ 다시는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단 생각을 4명이 동시에 느꼈다.
 
이걸 왜 쓰고 있냐면 내가 먹은 우동을 자랑하고 싶어서랄까. 아니면 sns에서 떠도는 1월 1일 루틴 중에 엄청나게 빡센 루틴을 가진 집(무려 낮잠 자기가 루틴에 포함되어 있던 집.)을 봐서 그런가. 그냥 써본다. 
 
그리고 우동집 아주머니가 돈 많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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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집에 상실의 시대라는 책이 있었다. 웬 사람의 실루엣만이 있는 뭐랄까 그 당시엔 약간의 음침한 기분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당시에 내 나이는 꽤 어렸고 그때도 역시나 재미없는 책에 대해 읽는 것을 싫어했던 나였기에 초반부정도까지 읽고 더 이상 읽지 않았던 책으로 기억된다. 
 
최근 어느 서점에 가도 초록색과 빨간색의 껍데기에 덮여진채로 한 곳 전체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집에 이 책이 있다는 것을 까먹고 노르웨이의 숲으로 다시 사온 나의 가족 덕에 서재에서 찾아볼 필요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필요도 없었다.
 
1월 1일이 된 날, 오늘은 이 책을 다 읽어 보겠노라 마음먹고 책장을 펼쳤다. 
역시나 나이가 들고 다시 선택한 책이라 해서 나에게 다른 감정으로 다가올 리 없는 책이었다.
처음 80쪽까지는 여전히 흥미가 없었고 반절정도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의문을 남겼고, 마지막까지 도달했을 때는 첫 장에서 나왔던 그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의 친구들과 다를 바 없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 길을 잃은 줄 알았을 것이다.
 
주인공 근처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어린 나이의 주인공에게 아마도 이 부분의 무게는 꽤 크게 다가왔을 것이라 생각된다. 주인공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비슷한 듯 다른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주인공보다 더 불안정한 상태이다. 서로가 처음 사건이 일어났던 그 순간 이후로 두 번 다시 안 봤다면 이 책의 이야기는 달라졌을 까.
둘은 서로를 의지하고 슬픔을 잊으려는 듯 노력하며 세상을 산다. 그리고 서로를, 어쩌면 한쪽에서는 사랑이라 인지한다.
과연 그들은 사랑이었을 까. 내가 생각하기엔 소중했던 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서 생긴 비어있는 감정이 가져다준 불안정감 같다. 안정적이지 않기에 서로를 의지하고 그렇기에 더 소중한 느낌. 난 사실 이 책의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보다는 상실의 시대가 더 어울린다 생각한다. 마치 책의 제목처럼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 같았으니까.
 
나오코는 슬픈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소중하게 생각했을 사람을 둘이나 잃었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가장 불안정한 사람으로 나온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토록 불안정한 생각을 하는 것일까. 감정에 파도같이 쓸려 자신을 가두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 사람의 주변 인물들은 행복하려 해도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 단정 지었다.(이후에 나오는 레이코를 통해 나오코라는 사람으로 치유를 얻은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꽤나 노력을 하지만 결국 그녀는 삶을 살아가기보다 삶의 일부인 죽음을 선택한다. 레이코에게 옷을 주겠다는 쪽지 하나만을 남긴 채 그녀는 떠났다. 나오코는 레이코가 삶을 살아가길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살아갈 때 입을 옷을 남긴 게 아닐까. 확실히 나오코는 레이코에게 치유를 주었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보다는 강한 사람이다. 살아가기 위해 답을 찾고 극복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그의 룸메이트인 특공대 이야기가 나온다. 와타나베는 자신의 유머를 위해 거리낌 없이 룸메이트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지 사람을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소재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쾌했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특공대에게 어디선가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을 가졌다. 와타나베는 스스로가 나가사와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 둘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여자와 관계를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게 바로 청춘이다 뭐 그런 느낌의 하루키의 생각이 담겨 있는 것 같았지만, 둘 다 사랑 없이 관계를 하는 부분에서 별다른 문제를 못 찾는다.(이후에는 찾게 되는 것 같지만.) 이것저것 생각하면 더 있겠지만 와타나베가 단점만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에게도 장점이 있다. 나는 불안정한 사람에 대해 사실 쉽게 놓을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꽤 빠르게 스며들기에 나였다면 나오코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뒤로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에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녀의 언니, 그녀의 남자친구 기즈키처럼 그녀를 두고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곁에 없을 때도 시시콜콜한 자신의 모든 이야기들을 편지로 보낸다. 나오코에게 끊임없이 삶에 대해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책내용은 와타나베의 편지 내용과 함께 그날그날의 기록처럼 쓰여 있다. 그래서 다른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은 오로지 내가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이 책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한다. 그저 남아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다 다르게 살아갈 뿐이다. 
이 책을 읽는 중에 기즈키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는 왜 죽기 전에 "오늘은 지기 싫었거든."을 말했을 까. 지극히 일상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한낱 게임에서 그러지 말고, 진짜 필요했을 자신한테나 지지 말지.
죽음에게 가로채이기 전에 지지 말고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어쩌면 이 책에서 나오는 몇몇의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오코의 생각도 궁금했다.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참 이기적이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거라면, 기억은 커녕 그저 희미한 존재로 향의 연기 처럼 사라졌어야 됐을 것 같다.
맞다. 솔직히 나는 이 커플이 싫다.
 
나는 이 책이 필독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글귀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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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여러 연말 약속을 지나 어느덧 2024년의 마지막 하루가 되었다.

2024년이 되었을 때도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발만 내딛으면 2025년이 된다니.

2024년에는 꽤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러시아 전쟁에 참전한 북한 병사의 이야기들이나, 며칠 전 일어난 항공기 추락 사고라던지. 공평하게 흘러가고 있을 시간에서도 공평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어렸을 때는 이런 사고 소식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왜 잊혀질 때쯤 하나씩 참사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만큼의 뉴스를 보지 않아서 였을까. 철렁거리는 마음이 익숙하지 않다.

 

나이가 든다는 게 어떤 면에서 보면 축복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해지는 감정으로 와닿는다. 아마도 이기심이 불러오는 감정일 것이라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경계선이 뚜렷했다. 봄에는 벚꽃을 보러 가고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러 계곡이나, 빠지, 워터파크, 그것도 다 할 때쯤 바다로 여행을 갔다. 가을에는 한강으로 피크닉도 가고, 날씨가 좋으니 친구들과 어디든 여행을 다녔고, 겨울엔 스키장으로 여행 계획을 짰었다. 이빨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운 한파에도 친구들이랑 털모자를 눌러쓰며 즐거웠던 시간을 보냈었다.

20대가 지나 30대가 돼 보니 이제 친구들도, 나도 너무 바쁘다. 20대에는 공부만 하면 나머지는 다 놀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30대에는 놀 시간을 만들기 위해 꽤나 노력이 필요했다. 더 이상의 계절에 따른 감성은 내 인생에서 사라지고 있다. 옛말에 젊을 때 더 많이 놀아야 된다는 말이 이제는 퍽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어렸을 적에 해 질 녘까지 친구들과 신나게 놀이터에서 놀다가 배고파질 때쯤 집으로 들어갈 때의 기분을 기억하는 가. 나의 10대와 20대는 아마도 놀이터에서 놀던 그때의 꼬마였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친구들과의 시간이 줄었다면,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늘었다. 어쩌면 엄마, 아빠는 내가 친구들과 다 놀다 오길 기다려 준 것 같다.

부모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꽤 즐겁다. 나이에 따른 충고도 가끔 들을 기회가 있는데 최근에는 살짝 무서운 말을 들었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시간은 아무렇지 않지만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는 시간은 꽤나 힘들다는 것을. 아직 시간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알지 못하니, 사실 두렵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간이 흐르기에 나이가 드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고, 그렇기에 나 또한 늙어가는 게 당연한 건데 피터팬 증후군이라도 걸린 것인지 요즘 들어 참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감정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비옥한 토양이 쌓이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숲이 되고, 땅에 있는 수분이 다 뺏기면 아무것도 살지 않는 사막이 될 수 있듯이 감정이 쌓이면 그게 나의 얼굴이 된다. 내 얼굴에는 내가 쌓아 뒀던 감정을 머금고 있다. 가끔 거울을 본다. 내 무표정에 인색함이 있지 않은 지, 내가 웃을 때는 어떤 얼굴인지 관찰한다. 주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체크해봐야 한다. 무관심 또한 조절할 필요성이 있다. 사실상 조금이라도 귀찮아진다 싶으면 무관심해지는 게 더 심해졌달까. 내가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무관심이 당연해진다면 나 또한 그들의 기억 속에 무의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감정에 모든 것들을 품을 수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명체가 숨 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 장점 중 하나로 오래 걷기가 있다. 2만 보도 걸으니 걷는 건 자신이 있었다. 물론 믿는 구석이 있었다. 표지판. 표지판만 보면 어디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기에 난 새로운 길에서도 내 체력만 되면 그냥 걷는 것을 좋아했다.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누군가가 만들어 둔 표지판이 있지만 인생에는 그 표지판을 내가 만들어야 한다.

어디인지도 모른 채로 익숙하게 너무 많이 걸은 것이 문제였을까. 길이 안 보인다.

어렸을 때와, 나이가 들어 길을 잃는 게 다른 것 같다. 뭐 랄까. 어두움의 깊이가 다른 것 같달까. 검정에도 다 같은 검정이 아니듯 내가 걸어온 길이만큼 더 깊고 더 진해진다. 어쩌면 사실 표지판이 있는데 내가 있는 곳이 너무 어두운 것일까도 생각해 봤었다. 근데 그렇게만 생각하면 너무 슬프기만 하니까 그만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왜 어둠도 시간이 지나면 눈이 적응을 한다 하지 않는가. 슬슬 보일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내년엔 더 좋은 일들이 생길 것 같다.

그런 거 보면 엄마, 아빠는 얼마 큼의 어두움에 적응한 것일 까?   

 

2025년에는 올해보다, 지금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자. 더 많은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제 진짜 곧 지나갈 2024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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