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1월이 되었다. 이제 올해가 가기 전까지 단 두 달만을 남겨둔 상황이다. 나는 과연 올해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 최선을 다해 바쁘게 살았을 까. 결과적으로 나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바쁘게 살지 않았다 해서 여유를 가지고 나를 위해 살았나 생각해 봐도 나는 이도저도 선택하지 못한 한 해였던 것 같다.
차라리 완벽하게 편안한 쉼을 선택한 것도 아니라는 부분이 아쉽다. 왜 그랬을 까.
나이가 먹을수록 1년의 단위가 참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체감 상 거의 버스 정류장 지나가듯 한 달, 두 달 그렇게 지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 사이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잠시라도 눈을 떼면 이미 손에서는 멀어져 원래 내려야 할 정류장이 아닌 그다음 정류장으로 가고 있는 상황이다. 처음엔 그 상황이 당황스러웠는데, 이제는 더 늦기 전에 그다음 정류장에서라도 내려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친구 관계도 그렇다. 나도 모르게 멀어져 버린 내 친구들이 올해도 존재한다. 어렸을 때는 친구를 사귀는 게 참 쉬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친구를 잃는 것 역시 참 쉬워진 것 같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듯이 모두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에, 그 사이에서 오는 아쉬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어쩌면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어렸을 땐 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현실이 새롭고 흥미롭게 다가왔는데 어느 정도 성장한 지금의 상태로 보면 흥미롭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나 또한 변해버린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일 뿐이겠지.
나는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생각이 쌓이고 그 쌓인 생각 위로 또 다른 생각이 쌓이는 것이 나는 참 좋았다.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얻을 수 있는 큰 장점이라 생각했었다. 간과했었다. 생각에는 좋은 감정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렸을 때는 기쁨의 기준치가 낮았던 것 같다. 풀밭을 걸어가도 신이 났고, 모든 게 궁금했고, 그래서 모든 시간들이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커가면서 기쁨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쁨보단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 더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모든 것에 무뎌진 감정을 갖게 되었다. 맞다. 나는 어쩌면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슬픔에 대해 배워가고 있는 것 같다. 감정은 다양하기에 이 시간이 지나면 나는 또 다른 감정에 대해 배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인간이라는 기준치에 맞는 감정들을 가지게 될 테니 지금의 이 생각도, 익숙해지자.
아! 그래도 자격증을 두 개나 땄다. 새로운 환경에서 경험도 해보았다. 잘 되지 않은 결과라 할지라도 꽤 여러 곳에 발을 넣어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올해의 나에게 부족하다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이유는 아마도 세상 모두가 나보다 더 바쁘게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인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오늘, 내일을 더 열심히 생각하고 살아가기로 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어느 정도 일지 몰라도 열심히 살고 싶다. 오늘 같이 또 후회되는 시간을 갖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년엔 더욱 발전한 나를 만나길 바라고 바란다. 힘내보자!
그대가 자신의 별을 따라가는 한, 영광스러운 항구에 실패 없이 도달할 수 있으리라. - 단테의 신곡.
나는 꿈들을 많이 꾼다. 영화같이 긴 내용의 꿈들도 꾸기 때문에 꿈을 꾼 날에는 기분이 극명하게 갈린다. 흥미진진한 내용의 꿈들을 꾸면 꿈에서 깨기 싫어진다. 도망을 치거나 무언가 사건의 목격자가 된 꿈들에서는 깨고는 싶지만 결말까지 보고 싶은 아이러니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달콤한 상상의 꿈들에선 꾸고 난 후 나의 일상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기분 좋은 스타트가 되지만 불쾌할 정도로 찝찝한 꿈들에서는 하루 종일 꿈에 대해 되새겨 보다가 그날 하루가 끝나기도 한다.
내 꿈에서는 시점들이 계속해서 변화된다. 지난번 어떤 꿈에서는 피해자, 가해자, 목격자의 모두의 시점을 볼 수 있었다. 역시나 오늘의 꿈에서도 나의 시점은 계속해서 변했다.
오늘 꾼 꿈은 약 40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꾼 꿈이었다.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길래 적어본다.
< 꿈속의 시점 변화 > 1. 의사들. 2. 실험체로 추정되는 두 분류로 나뉜 사람들. 3. 특이한 형태의 괴물들. 4.곳곳에 설치된 CCTV
< 꿈속에서의 등장인물 형태 > 1. 의사 - 공통 오브젝트 : 의사 가운. 가운 외에는 캐주얼하게 입거나,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2. 사람들 - 병원 환자 복을 입고 있기도 했고, 일반 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환자복이 70%, 일반복이 30% 3. 괴물 - 검은 봉지를 얼굴에 쓰고 있어서 눈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 몸 전부 살이 있을 곳엔 검은 물감이 묻어 있다. 입고 있는 것도 밭에서 사용한 비닐 멀칭처럼 모래가 묻은 낡고 찢어진 검은 비닐이었다. 공사장 같은 데서 보이는 기다란 검은 비닐들로 온몸이 감아져 있었다. 4. 스프레이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세모난 삼각원뿔형태의 스프레이.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으며 투명한 것도 있고 뿌연 파란색도 있지만 내부의 액체는 보인다. 5. 주사기 - 얇은 주사기. 의사들은 주사기를 들고 있을 때 모두 흰색 손장갑을 꼈다.
< 환경 > 1. 밤이였다. 2. 건물 위층에서 아래를 보면 나무들이 빼곡하게 많아 온통 검은 숲들로 둘러쌓져 있다. 3. 달의 빛이 은은하게 건물을 비추고 있다. 4. 건물의 내부에 어느 벽들은 힘을 주면 슬라임처럼 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5. 건물 내부 : 통유리로 되어 있는 창문이 깨져있으며 꽤 오랫동안 방치되어 이끼가 끼어있는 층들이 있는가 하면 어제까지도 사용했던 것 같이 모든 오브젝트들이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층들도 있다. 6. 의사들이 시체를 옮기고 있던 곳엔 화장터처럼 네모난 직육면체 공간이 길게 뚫려 있는 벽이 있었다. 7. 복도 곳곳에 나무로 만들어진 파티션들이 벽 쪽에 세워져 있었다. 8. 이불이 있는 방의 이불들과 위에 달려있는 스프링 클러는 이전에도 사용했던 것 같이 사용 흔적이 남아있었다. 9. 의사들이 연구하는 연구실에는 파란색 불이 희미하게 있고 중간중간 책상에 LED 조명이 켜져 있었다. 10. 형광물질이 사람의 몸에 닿을 때는 형광색 물감이 물풍선에서 터지듯 묻은 것처럼 보였다.
커다란 건물 두개가 쌍둥이처럼 붙어있었으며 가운데 연결된 통로로 넘어갈 수 있게 생긴 구조였다. 통유리의 창문을 통해 반대쪽 건물에서의 움직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실험체에 포함되는 인물 1이었는데, 시간 안에 살아남은 후, 다시 불특정한 쉬는 시간을 가지고 반복하는 형태였던 것 같다.
내가 있는 쪽 건물에서는 눈이 안보이는 괴물들이 스프레이를 들고 뿌리면서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스프레이 속에는 형광 물질이 들어있는지 사람한테 뿌리면 형광이 반응하였다. 벽이나 물건들에 뿌렸을 때는 형광이 발현되지 않았던 걸로 보아 아무래도 체온이라거나 사람에게만 있는 반응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형광 물질이 몸에 묻은 사람들은 스프레이 뿌리는 괴물 뒤에 있던 괴물들에게 끌려갔다. 형광물질이 몸에 묻어 있어도 괴물들의 눈을 피해 도망을 친다면, 불이 꺼질 때까지 쉴 수 있는 이불이 있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묻은 옷을 벗고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워낙 건물 내부의 빛들이 없었기 때문에 형광의 색들은 눈에 너무 잘 띄었다. 사람들 또한 그들과 같이 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형광물질이 닿아 몸에 묻거나 같이 있다가 표적이 되어 스프레이에 맞을 확률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극한의 이기심들이 눈앞에서 일어났지만 딱히 서로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일정 시간동안 괴물들을 피해 스프레이를 맞지 않고 피하면서 건물에서 불이 켜져 있는 이불들이 펼쳐진 방으로 들어가면 불이 켜져 있을 때까지 잠시 동안은 쉴 수 있었다. 물론 불이 꺼지면 다시 도망쳐야 되는 상황이었다. 건물 내부는 거의 모든 곳이 불이 꺼져 있기 때문에 불이 켜져 있는 공간은 반대쪽 건물에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팀을 나눠 반대쪽 건물과, 본 건물에서 서로에게 불빛이 있는 공간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도망치던 사이에 반대쪽 건물에서 의사들이 사람을 죽이고 유기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목이 잘린 시신의 목에는 붕대로 돌돌 말아져 있었다. 의사들이 시신의 팔다리를 들어 어딘가로 이동하던 중 도망치던 또 다른 사람들과 마주쳐서 시체를 바닥에 두고 그 사람들을 쫓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거기 있던 의사들은 괴물들이 데려간 사람들을 데리고 임상 시험을 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 같다.
반대쪽 건물에는 두 종류의 의사들이 있었다.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의사와 몰래 형광 물질에 대한 백신을 만들고 있는 의사.
CCTV의 시점으로 보게 된 기억은 이렇다. < 복도의 CCTV - 소리 녹음 X > 엘리베이터의 문안으로 숨어 들어가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에게 의사들이 무언가를 이야기하면서 다급하게 접근했다. 이후 파란 물질이 들어가 있는 주사기를 그들의 팔에 주사하는 것을 보았다. < 연구실의 CCTV - 소리 녹음 O > 의사들끼리도 의견이 다른지 주사를 맞겠다고 싸우는 의사들이 생겨났다. 어떤 의사는 자신한테도 주사를 놔달라며 옆의 의사의 멱살을 잡으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뒤에 있던 다른 의사가 와서 파란색 약물이 들어있는 주사기로 주사를 놓는 척하다가 주황색의 약물이 들어있는 주사기로 바꿔 치기 해서 주사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영향을 받는 건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투약할 양이 인원수대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 < 불이 켜져있는 이불이 펼쳐진 방 > 여기에는 이불들이 수련회에 갔을 때처럼 바닥 전체에 침구가 깔려있다. 침대가 있거나, 바닥에 이불이 깔려 있거나, 또 이불이 작거나 크거나, 침낭이거나 했는데, 방을 찾아 간신히 살아 들어온 후에도 내부에서 다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어야 됐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 5명이라 5명의 자리를 맡아 둔 거라면서 이불을 움켜쥐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4명 정도의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대형 침대에서 혼자만 쓸 것이라면서 소리 지르는 아저씨도 볼 수 있었다. 문 앞에서는 사람들이 자리를 찾기 위해 이동을 했고, 문 바로 앞에 있는 이불들에서는 쟁탈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문 앞자리인 만큼 사람들 사이에서 뺏고 뺏는 싸움이 일어났었다. 그 사이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리옆에 사람 한 명 더 들어올 수 있다면서 자리를 뺏기고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데려가기도 했다.
< 이불이 켜져 있는 방의 규칙 > 1. 괴물들이 방 근처를 걸어갈 때 방의 불이 꺼지면서 방에 있는 모두가 이불속으로 들어가야 됐다. 2. 만약 누군가가 이불 밖을 나와있다면 천장에 있던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면서 형광물질이 비처럼 나오게 된다. 3. 그 사이 괴물들은 형광물질을 맞은 사람을 데려가고 형광물질을 피해 이불속에 있던 사람들은 괴물이 지나간 후 방에서 나와 다시 도망가야 됐다. 4. 스프링 쿨러가 작동된 방은 더 이상 불이 켜지지 않게 되며 괴물에게서 안전하지 않게 된다. 5. 만약 모두가 이불속에 있어서 스프링 클러가 작동되지 않았다면 불이 다시 켜지며 안전한 공간으로 남는다.
결과를 못보고 꿈에서 깼기 때문에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꿈꾸고 난 후 시간이 꽤 지나고도 기억되기에 적어둔다. 지난번엔 파만 먹는 게스트 하우스에 가서 아침밥으로 익은 파를 통째로 썰어 먹고 있었던 게 오래 기억됐었는데 이번 꿈으로 갱신한 것 같다. 아, 참고로 다른 손님들은 파로 샌드위치를 해 먹거나, 파를 갈아 우유쉐이크를 해 먹거나, 파를 먹는 척하고 그릇에 두고 신문만 읽거나 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았던 어느 하루, 경희궁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도 좋아했던 에스프레소를 유럽여행을 통해 더 좋아하게 된 나는 오늘도 이탈리아에서 마셨던 그 맛을 잊지 못해 주문해 보았다. 그리고 메뉴판 끝에 내가 좋아하는 샤케라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들 샤케라또에 대해 알고 있는가? 어느 날 문득 처음 가본 카페에서 샤케라또를 발견했다. 이름이 참 특이하네 싶었던 나는 주저없이 주문했고 원래도 쓰고 단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기가 막힌 데스티니를 느낄 수 있었던 맛이었다. 에스프레소를 시럽과 함께 얼음과 미친 듯이 흔들어 마시는 음료를 도대체 누가 처음 만들어 먹었을까? 그 누가 되었든 내 입맛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카페에 잘 없는 메뉴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메뉴판에서 만날 때는 기대감에 부풀어 주문하게 되는 음료 중 하나이다. 다행히도 나는 카페인에 놀라울 정도로 무디다. 하루에 커피를 5잔 마셔도 전혀 두근 거리지 않는다. 잠도 물론 잘 잔다. 그렇기에 부담 없이 다양한 커피를 맛보고 즐길 수 있다. 처음 에스프레소를 주문한 날 느꼈던 작디작은 나의 컵을 기억하며 두 번째로 여운을 즐길 샤케라또도 같이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며 창가쪽에 여유롭게 자리를 잡았다. 창문 밖에 조경으로 돌들을 담처럼 쌓아 넣어둔 벽을 보고 있자니 날씨가 딱 이 정도 가을의 느낌이 날 때 친구랑 같이 간 카페에서 주문했던 후추 에스프레소가 생각났다. 성당을 전망으로 옥상에 있는 카페였는데 메뉴를 주문하러 간 데스크가 이런 돌들로 껴서 만들어져 있었다. 사실 그때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 주문했던 후추 에스프레소 때문이었다. 후추가 생각보다 에스프레소랑 어울리데? 후추 에스프레소를 생각하다 내가 언제부터 커피를 이렇게 좋아 했었나 기억을 되돌려 보았다. 아마도 대학생 때 처음 만났던 커피 장인이 내가 커피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대학생이 되면서 드디어 커피를 당당하게 마실 수 있었다. 초등학생 때 엄마 옆에서 한 개씩 얻어먹었던 에이스 과자에 묻힌 맥심커피 맛. 나의 소중한 기억 중 하나이다. 우리 엄마는 커피는 커서 먹어야 된다고 했었다. 그리고 지금에나 카페들이 이렇게 많지 사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카페도 그렇게 많이 있지 않았었다. 있어도 핫초코를 먹었었지. 그렇기에 대학생 때부터 진정한 커피를 마시게 되었었는데 진정한 커피 맛에 눈뜬 날이 바로 친구들과 간 정동진 여행 때였다.
정동진역 옆에 있는 해돋이를 볼수 있는 카페에는 커피 장인이 살고 있다. 대학생 때 갔던 기억이라 지금은 없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는 엄청난 장인이 바다와 함께 npc처럼 존재했다. 그 당시 밤 기차를 타고 정동진역에서 내리면 새벽이 지날 때까지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1. 새벽이 지날 때 까지 깜깜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역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는다. 2. 기차가 정동진 역에 도착하자마자 역 앞에서 방을 빌려주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여러 어르신들 중 한 분의 집으로 가서 3만원을 내고 대실한다. 3. 걸어서 갈수 있는 위치의 24시간 하는 카페를 찾아간다.
우선 첫번째는 해보려다가 너무 무서워서 그만뒀다. 정동진을 찾아갈 때쯤엔 내 시간은 항상 겨울이었는데 추운 바람과 함께 노숙을 하기엔 그곳은 너무 깜깜했다. 두 번째, 친구들과 선택했던 인심 좋아 보이는 할머니네 집은 너무나도 더러웠다. 바닥이 끈적거리는 건 양말로 어떻게든 버텨보았지만 침대 위에 머리카락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의 털은 3만원을 깃털처럼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의 더러움이었다. 우리는 바닥에도 침대에도 못 앉아 있다가 해가 뜨자마자 벗어났다. 소중한 추억이며 값진 경험이었다. 세 번째로 선택했던 카페는 폭신한 기다란 의자가 가득 있었다. 커피 냄새가 가득했던 그곳은 우리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와서 따뜻한 커피를 시켜 마셨다. 그 새벽에 자리가 없을 정도였으니 우리만 몰랐던 히든 카페였던 것 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할 때쯤 바리스타 자격증이 줄줄이 있는 한쪽 벽을 보았다. 장인이 살고 있었다. 외국어로 휘갈겨 뭔가를 증명하는 것 같이 생긴 자격증들이 한가득 있었다. 아저씨 장인이셨구나 싶은 마음으로 마셨던 커피는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아직 잊히지가 않는다. 여기저기 따뜻한 커피로 몸을 데우고 수면제를 먹은 것 같이 픽픽 쓰러져서 자는 모습을 보면 진짜 게임 속 여관느낌이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통유리였던 카페에서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주황색의 빛이 카페 가득 들어오던 그날의 따스함은 오랫동안 기억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창문 밖으로 선선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어디선가 나타난 호랑나비가 내 옆에서 날아다녔다. 열린 창문은 못 찾고 닫힌 창문들에만 다가가 부딪히는 중이라 문을 열어줘야 되나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나의 커피들이 나왔다.
나의 샤케라또. 그건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니였다. 내 거품 어디 갔어? 10월의 시작, 나의 설레는 마음은 샤케라또 거품처럼 사라져 갔다.
우리 동네 우리 아파트 단지는 지금 엘리베이터 공사를 한다. 4월부터 9월까지의 대공사. 랜덤인 것 같은 공사 날짜가 엘리베이터에 공지되었을 때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던 모두가 조용해졌다. 3월의 선선했던 그날에 우리가 그토록 조용해졌던 이유는 별거 없었다. 무려 한 달 동안 하는 대 공사에 하필이면 가장 더울 때의 한 달이 우리 아파트가 된 것뿐이랄까. 초조하게 다가오는 공사날짜에 맞춰 물이나 쌀 등 무거울 만한 택배들을 미리미리 주문해 두었다. 그래도 한 달이면 길고도 짧은 시간이니까. 사람들도 모두가 한 마음이 된 것 같이 비슷하게 준비해 두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이 문장은 플레그였다.)"라는 생각과 함께 기다리던 엘리베이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최근 여름에 하는 엘리베이터 공사로 인해 고령의 어르신들께서 집안에서 발이 묶여 병원도 못 가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현실이 된 이 순간, 가령 어르신들 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 나이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에 속하는 데도 정말 땀이 비 오듯 하더라. 단순한 근력 운동도, 유산소 운동도 아니다. 일직선으로 이어진 계단도 아닌 이 돌고 돌아야 되는 무수한 계단은 공포로 다가오기 충분했다. 그것도 고층에 살고 있다면? 나도 이렇게 힘든데 어르신들은 정말 아찔하다. 우리 집은 17층이다. 처음부터 냉장고를 채워둘 것이 아니었다. 운동을 했어야 했다. 체력을 쌓아 뒀어야 됐다는 말이다. 생각보다 체력은 쉽게 쌓이지 않았다. 재활용을 버리러 가는 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날,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날, 외식하러 가는 날, 택배를 찾으러 가는 날, 자격증 받으러 간 날, 엄마랑 운동 가는 날. 모든 날들을 다 쌓아도 나의 체력은 그대로였고 그때마다 내 숨은 턱끝까지 차오르며 곧 죽을 사람처럼 헉헉거렸다. 이 정도면 평소에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건지 반성을 해야 될 체력이었다.
숨찬 하루하루를 보내던 우리에게 장마가 왔다.
비가 온다. = 우산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이 수식은 평소엔 간단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무서운 결괏값을 가지고 있다. 엘리베이터 공사를 하는 이 시점에선 우산을 깜빡한다면 집까지 다시 걸어 올라와 우산을 가져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장마가 시작되고 며칠 후, 누군가 인간은 진화의 동물이라 했던가. 사람들이 문 앞에 우산을 두기 시작했다.
이렇게 힘겹게 집을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는 나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무런 짐을 들고 올라오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인생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집을 나간 사람 = 집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운반할 사람
참 웃긴 게 막상 나가면 책임감이 생겨서 뭐라도 사서 오게 된다. 내가 가족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이 기회에 알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직해진 두 손에서 가족의 사랑을 느꼈다면 이제 다시 현실과 마주해야 할 때. 13층까지 정도를 올라가면 가족의 사랑이든 뭐든 다 내려 두고 오로지 내 몸 하나만이라도 집으로 던지고 싶다. 힘겹게 집에 들어간 후엔 가족들의 손길이 느껴진다. 내가 아닌 내가 가져온 나의 사랑(보통 먹을 거)으로.
택배와 배달과도 거리를 두게 되는데(우리는 이때 하필이면 캐리어가 망가져서 두 번이나 캐리어를 받아야 했다.) 원래부터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에 대해 차이가 컸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왜 이렇게 배달음식이 땡기고 사고 싶어지는 게 많아질까. 그래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음식점 대부분 가서 먹는 게 배달해서 먹는 음식 값보다 싸다. 배달비를 내니까 가격이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던 우리는 거의 500원에서 1000원 차이가 나는 가격을 보고 배달의 민족과 요기요를 등지게 되었다. 포장에서도 가게에서 포장하는 가격이랑 앱에서 할인받고 주문하는 가격이랑 다르더라. 아마도 수수료 때문이겠지라는 생각에서도 예전에 보였던 동네 배달북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 기회에 배달을 끊고 직접 가서 포장해 오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우리가 얼마나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살았었나에 대해서도 고찰해 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공사를 통한 또 한 가지의 순기능, 바로 주민들과 꽤 자주 볼 기회가 생긴다. 적어도 도착지점이 나의 가는 길 사이에 있거나 나의 도착지점보다 위라면 우리는 함께 걷는다. 물론 아무 말도 없이 걷기도 하지만 보통 그 순간의 마음은 같다. 너 마음이 내 마음이다 보니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묻는 질문 "몇 층 가세요."는 대답으로 들려올 그곳이 어디든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기 충분한 근본의 힘이 된다. 아이들과도 자주 만날 수 있는데 함께 가진 못한다. 워낙 체력이 달라서일까. 날쌘돌이도 이런 날쌘돌이가 없다. 환한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하염없이 나의 젊은 날이 그리워 질 정도였다. 순수한 아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도착지점에서 나를 기다려 준다. 힘내라는 응원과 함께 밝은 인사를 하고 뿌듯하게 집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정말 귀여우면서도 그들의 체력이 너무 부럽다. 중간 중간의 층 사이에 쉬어가라는 의자가 하나씩 있는데 여기서도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이곳에 앉아 숨 좀 쉬었다가 갈지, 지친 나의 멱살을 잡고 집에 올라가서 쉴지. 나는 거의 이중인격이 된 것 같이 번뇌에 빠진다. 처음에는 보일 때마다 쉬어보았다. 한결 편하긴 하지만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늘어졌다. 땅만 보고 쉬지 않고 올라간 날은 4분 만에 도착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체력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시간으로 한 시간을 쏟아야 했다. 적당히 쉬다가 적당히 올라가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언제나 순기능만 있을 순 없는 이 상황에서 사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순간은 택배도, 배달도, 약속이 있는 날도 아닌 누군가의 담배 타임이다. 흡연. 우리 가족은 아무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 덕에 담배냄새에 정말 예민하다. 그리고 일단 간접 흡연으로도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 다는 것이 가장 별로다. 니코틴이 주는 행복을 느끼지도 못한 채 암에 한걸음 다가가야 된다니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순간이란 말인가. 모든 암의 첫 번째 원인이 되는 것이 흡연이다. 담배는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 어느 정도였든지 금연을 하는 그 순간부터 몸에 반응이 긍정적으로 온다. 그런 담배. 관리 사무소에서 가끔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한다. 세대 내의 흡연으로 인해 많은 민원이 발생하니 화장실이나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 것을 권유하는 내용의 방송. 하지만 엘리베이터 공사가 시작되고 담배냄새는 하루를 멀다하고 하루에도 3,4번씩 집안을 가득 채웠다. 물론 그들이 이해는 간다. 담배를 피기 위해 오르락 내리락 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럼 그냥 시간대를 정해서 방송을 해줬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 시간에 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고 있는 게 나을 것 같다. 담배는 왜 태워야 될까. 그냥 씹어 먹는 사탕이나 껌으로 개발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권리는 참 답이 없는 것 같다. 나의 권리가 있다면 상대방의 권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함께 협력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더 나은 방향을 찾아 끊임없이 탐구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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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에 대해서 신기한 상황도 있었다.
어느 날은 3시부터 6시까지 거의 30분에 한 번씩 담배냄새가 나길래, 처음에는 짜증이 났지만 연거푸 나니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담배를 찾게 될 상황이면 담배를 피울게 아니라 울어야 되는 거 아닌가. 본 적도 없는 누군가가 걱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 이 정도면 인류애가 꽤 있는 것 같기도.
아무쪼록 엘리베이터 공사가 하루 빨리 끝나서 안전하게 새롭게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그동안 너무 엘리베이터에 대해 감사함을 못 느꼈던 것 같다.
엘리베이터 공사가 끝나면 물론 아쉬운 부분도 생기겠지만 이번 기회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감사함을 알아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 그리고 이번 기회에 살면서 볼일 없었던 스티커를 만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가 들어 있는 벽에 붙어 있는 스티커.
무슨 의미인지는 갤럭시 서클투 서치로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잘 모르겠다. 대충 주의하라는 경고 스티커가 아닐까 예측해 본다.
4월 8일 아침 8시 40분까지 오라는 문자를 받고, 나는 요양 보호사 교육원을 들어갔다. 문 앞 바로 앞자리, 선생님도 실습 현장도 바로 볼 수 있는 사실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기 위해 남들보다 더 빠르게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나의 동기들이 하나둘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첫날이라 다른 날 보다 특별했던 건 앞으로 우리가 배울 내용이 담긴 교재를 받았다는 건데, 바로 내 앞 공동 테이블에서 한 권씩 가져갈 수 있게 놓여 있었다. 으레 짐작은 했지만 내 또래의 젊은 사람은 없었다. 지난번 기수에는 20대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번 기수의 내 동기들은 내가 제일 젊었고 이후 4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다. 나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80만원 정도의 돈을 내고 교육원을 등록했다.
최근 뉴스들을 통해 AI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에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가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요양보호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마침 기사 바로 밑에 있던 기사가 고령화 시대였던 것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취업 준비를 하다가 너무 나태해진 내자신이 꼴도 보기 싫어서 뭐라도 생산적인 것을 배워보자는 마음이 제일 컸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상황으로 나는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돈이 나가지 않을 수 있는 선에서 학원을 알아보았다.
1. 차비가 안나올 수 있게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가.
2.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집으로 올 수 있는 거리인가.
3. 내 소중한 돈을 써도 될 정도로 믿을 만한 교육기관인가.
4. 내 소중한 시간을 들이기에 망설일 틈 없이 최대한 빠르게 수업이 개강하는 가.
이 정도의 상황에서 맞는 곳을 찾기엔 굉장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추측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선택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2024년이 시작되면서 국비지원이 대폭 감소했기 때문이었는데(2023년까지만 해도 55% 정도 지원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10% 지원.) 그 결과 개강 인원이 채워지지 않은 많은 요양보호사 교육원들이 개강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5년 인증 우수기관으로 인증된 교육기관이 우리집에서 20분 정도만 걸어가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경기도에 살면서 걸어서 20분 정도면 가까운 편이라 생각했던 나는 꽤 조건에 맞는 이 기관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아주 특이한 문구가 내 눈에 들어왔다. 점심에 갓 지은 따끈한 쌀밥을 준다는. 뭐지. 이건?
처음엔 왜 밥을 학원에서 주는 것일까란 의문이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의문이 풀렸다. 아마 이 자격증을 준비하는 연령층이 우리 엄마 나이 때정도라 학원에서 밥을 주면 반찬만 싸서 오면 점심이 해결되니 꽤 매력 있는 솔깃함이었을 것 같다. 나 또한 이 문구에서 집까지 못 걸어오겠으면 학원에서 밥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른 학원들 보다 10만원 정도 비싼 등록비였는데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교육원을 바로 찾아갔다. 네이버 지도에서만 봤을 땐 초행길일 거라 생각했던 가는 길이 항상 밤마다 운동하러 지나갔던 그 길이란 걸 알고 묘하게 운명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익숙한 건물외관에서 낯선 내부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들어갔다. 살짝 열린 교실에서 선배 기수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 보면 쉬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수업을 듣는데 이 정도로 밝을 수 있다면 여긴 충분히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그날 다른 학원보다 10만원 정도 더 비싼 등록비를 지불하고 등록하고 나왔다.
두근 두근한 마음으로 친구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일단 수업을 기다렸다.
수업을 시작하니 가장 만족했던 변화가 바로 아침 일찍 일어나는 나 자신이었다. 9시 전에 도착해서 비콘과 출석을 해야 했기에 7시 40분쯤엔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집에서 교육원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20분이면 되는 거리에 있기에 산책하는 마음을 가지고 출발하면 딱이었다. 경우의 수가 있다면 가는 길에 신호등이 3개나 있는 점이었다. 나는 살짝의 낯을 가리기에 점심은 집으로 와서 먹기로 결정하고 점심시간마다 집으로 뛰어 왔다. 낯가림이 끝날 때쯤엔 엄마와 밥을 먹기 위해 뛰어 왔다. 수업을 배우던 중 어르신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이 함께 밥을 먹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로운 마음이 그 정도로 큰 것일까 하다가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도 밥을 혼자 먹기 싫을 것 같았다. 인간은 진화의 동물이라 하지 않았는가. 20분이 15분 되고 15분이 11분이 되는 기염을 토할 하체 근력을 얻었다. 그리고 집에 오니까 이상하게 힘들었던 게 싹 사라지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엄마 버프가 아니었나 싶다.
5년 인증 우수기관이였던 우리 교육원은 정말 엄청난 공부량을 가지고 있었다. 시험을 무슨 일주일에 3, 4번을 보는데 나중엔 8번인가 봐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이게 맞아?" 싶더라니까. 젊은 나도 이런데 내 소중한 동기들은 더 힘들어했다. 시험을 보고 일정 범위를 넘기지 못하고 틀리면 재시험도 보는데 은근히 이걸로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누가 요양보호사 쉽게 따는 거라 했어.
그래도 이 막대한 시험을 통해 문제를 거의 외우다 싶이 할 수 있었고 우리 기수 모두 한 번에 자격증 시험을 통과했다.
이론수업도 배우고 실습수업도 배우고 나면 진짜 현장으로 가는 실습만이 남게 되는데, 요양원 5일, 재가 5일을 가게 된다.
재가에는 주간보호센터 3일과 직접 어르신 집에 가는 재가방문요양 2일로 나뉜다. 사람마다 5일 내에서 나눠지는 일수는 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보통 실습은 둘씩 간다. 혼자도 가는 것 같지만 나의 경우는 모든 실습에 파트너 동기가 있었다. 그 덕에 마음이 훨씬 편안하게 실습을 할 수 있었다.
실습을 통해 느낀 점은 그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르신들의 감정이였던 것 같다. 나는 살면서 노인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한 적이 있었을까? 참 못났던 과거의 나였다. 모두가 지나갈 그 길에 대해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도 배움을 통해 지금은 조금 더 달라진 나를 얻게 된 것 같다.
실습에서 몇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일단 요양원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침대에 누워 계시며 티비 광고 소리에 맞춰서 손으로 리듬을 타고 계셨던 어르신이 제일 먼저 기억이 난다. 물론 이 어르신께 식사도움과 간식 도움을 하면서 애착이 생겨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르신이 웃으면 나도 모르게 같이 미소가 지어졌던 좋은 기억이 있다.
또 하나는 남자 어르신이였는데 내가 옷수납장을 정리해 드리니 고맙다며 레쓰비를 주셨던 것.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가 받게 된 레쓰비는 지금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진짜 감동적인 상황이었는데 치매 어르신께서 바닥에 침을 뱉는 습관을 가지고 계신 분이 계셨었다. 그런데 내가 지나가니까 잠깐 멈추셨었다. 찰나였지만 어르신이 나를 보고 침을 안 뱉었다는 게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아마 아무도 그때의 내 감정은 모를 것이다.
웃겼던 기억도 있다. 뜨거운 물이나 음료를 드릴 때 반드시 찬물을 섞어서 온도를 조절해서 드려야 하는 것을 수업에서 배웠기에 어떤 어르신께서 커피를 타달라 하셔서 적당한 온도에 맞춰 드렸다가 "다시" 소리를 들었다. 너무 찬물을 많이 섞었나 하고 조금 덜 섞어서 다시 드렸다가 들켰다. 뜨거운 물로만 탄게 맞냐며 추긍하셨지. 모른 체 하면서 있다가 또다시 "다시"를 듣고 진짜 조금만 찬물을 넣어 다시 만들어 드렸다가 또다시 실패했었다. 어르신 목에 과연 이게 괜찮은 걸까 싶어 슬쩍 지나가는 선생님께 물어보았다 정답을 들었다. "이 어르신은 뜨거운 물에 타서 전자레인지에 약간 더 돌려드려야 해요."
어르신은 내가 얼마나 답답하셨을 까. 다시 타드리고 만족하시는 어르신의 얼굴을 보고 역시 배움과 경험은 다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묘하게 그렇게 뜨거운 걸 잘드시는 어르신의 목을 걱정하고 있던 내 모습이 웃겼던 날이었다.
주간보호센터에서는,
첫날부터 계속해서 나를 보고 계신 어르신이 계셨다. 슬쩍 가서 말벗을 해드리려고 갔다가 따뜻한 말을 들었다. 일이 없을 땐 앉아야 된다고, 그러다 무릎 다 나간다며 내 손을 잡아끌어 옆에 앉혀주셨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다음 날에 나를 보자마자 손짓을 하며 이리 와보라 하셨다. 가봤더니 어르신이 손에 꼭 쥐고 계셨던 사탕을 나에게 주셨다. 나 주려고 가져오셨다며 활짝 웃으시길래 나 또한 웃음이 낫다. 그러다가 오후에 어르신께 가서 사탕 잘 먹었다 했더니 기억을 못 하셨다. 그 순간 마음이 너무 아팠다.
또 다른 어르신은 파킨슨 병을 앓고 계셨는데 내가 아파하실 때 옆에서 도움을 드렸던 걸 기억하고 괜찮아지시자마자 나에게 오셔서 끌어안아주셨던 것.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을 참 많이 느꼈다.
마지막 재가에서는,
치매가 있으신 어르신 집에 가서 집청소도 하고 말벗도 해드리며 함께 있었는데 어르신이 고스톱을 좋아하 신다 하셨다. 치매선생님도 오시고 고스톱 모양의 퍼즐도 맞추어 보시다가(고스톱 광 모양 퍼즐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어르신이 고스톱을 치시고 싶어 하시길래 같이 간 동기 선생님과 함께 게임에 참가했다. 앞서 퍼즐 모양도 고스톱 모양이었던 고스톱을 사랑하는 어르신께 고스톱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며 게임을 시작했다. 나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에 대해 알려주시는 게 좋으셨는지 계속 자신한테 패를 보여줘 보라 하시면서 자세히 알려주셨다. 그리고 꼭 말 끝에 절대 친구들이랑은 돈을 놓고 고스톱 치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주의를 주셨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게임을 하다가 연속해서 내가 이길 때가 있자 이게 바로 초심자의 행운인가 보다고 얘기하며 좋아했더니 어르신도 좋아하셨다. 그렇게 하나하나 알아갈 때쯤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같이 갔던 동기선생님과 치매 선생님과 어르신은 모를 만한 사실 하나가 있다. 사실 난 고스톱을 할 줄 안다. 핸드폰에 앱도 깔았던 고스톱게임. 게임 머니였지만 몇억씩 따고 좋아했던 때가 있었지. 연달아 이겼을 때 아차 싶어 다시 모른 척을 하면서 게임을 했었다. 그래도 어르신이 좋아했으니 거짓말이라도 선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습 때의 어르신들이 어제의 기억처럼 생생하게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만큼 나에게 좋았던 기억이었던 것 같다.
실습 마지막 날 어르신들이 건강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의 실습에 마침표를 찍었다.
내 소중한 동기. 나와 함께 실습을 나간 동기와 나의 나이차이는 무려 40살 정도였다. 이 부분이 놀랍고도 감사한 게 사실 나는 40살의 나이차이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나의 동기가 내게 해준 배려 덕분이지 않았을까. 하시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엄마가 스쳐 지나가서 더 귀여웠다. 어르신께 귀엽다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너무 귀여우셨는 걸. 힘들 때도 즐거울 때도 같이 있다 보니 지금도 가끔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언제 내가 40대, 50대, 60대, 70대의 사람들과 같이 수업을 들어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 생각해도 참 잘 선택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실습 장소에서 만난 요양보호사님들이 하나같이 20년 후에 다시 오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금은 더 해보고 싶은 거 해보다가 나중에 다시 오라고. 그때 다시 만나자고 말씀해 주셔서 마음이 찡했다. 나에게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딸 수 있게 만들어 줬던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참 소중하게 남은 것 같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있는 버스 안, 문득 나의 dap에서 늘어진 것 같은 반주가 시작되었다. 유명한 영화 ost였는데 원래 노래가 이렇게 늘어졌었나. 반정도 듣고 있는 순간 갑자기 슬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준비돼있지 않은 순간에 혹시나 내가 울게 될까 봐 날을 잡아 혼자 있는 날에 펑펑 울고 슬픔이란 감정을 닫아버린다. 최근에 울었던 적이 너무 예전이었을까. 요즘 부쩍 눈물이 튀어나오려 하는 순간들이 늘고 있다.
내가 슬퍼졌던 이유는 이렇다. 인생이 한곡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면 모두가 정박의 노래가 자신의 노래일지 그대는 확신할 수 있는가. 어쩌면 정박의 노래 사이에서도 가끔은 늘어지는 순간도 있지 않을까. 잘못된 노래 가사는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이상함이 없지 않은 그런 노래 가락이 귓가에 흘러나온다 생각해 본다면. 나는 과연 어떤 감정을 우선순위로 느끼게 될 것인가. 고요한 적막으로 나의 노래를 곱씹어 볼 것인지, 위태롭다는 감정이 느껴질지, 이것 또한 나의 인생이다 받아들일지, 노래 가사가 나오기도 전에 음악을 꺼버릴지,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무엇을 느끼겠는가.
한곡의 노래의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누군가는 노래의 평균의 시간을 계산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행동이 의미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여나 나의 노래가 3분 정도 흘러갔을 때 평균의 시간 속에서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안심하게 해 줄 요소정도일까.
나의 인생. 나의 날들. 나의 세상의 노래는 몇 분 정도가 적당할까. 나는 아마 수차례 시작지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어쩌면 수차례 지금의 이 순간을 나의 음악의 끝으로 선택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음악이 다 완성되지 않은 이 순간을 마지막으로 한다면 영원히 미완성된 곡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미완성의 곡이 완성된 노래보다 가치가 있을 확률은 어느 정도 될까. 억지로 마무리된 노래와 도입부부터 끌렸지만 완성되지 않은 노래. 이 두 가지의 노래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선택할 노래는 무엇일까?
내 선택은 이렇다. 나는 두 노래 모두 안 들을 것 같다. 그렇지만 노래가 꼭 누군가에게 들려야만 가치가 있을까. 그렇게 세상이 우리의 존재에 대해 감상할 선택권을 줘야 할까. 미완성된 노래도, 억지로 완성이 된 노래도 노래를 만든 그들의 용기로 만들어진 노래인데 말이다.
모두의 노래가 어떠한 장르를 선택할지는 노래를 만드는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이겠지만, 우리의 모두의 노래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슬픔만 남아있는 곡만은 되지 않길 바란다.
꼬깃한 종이 쪼가리가 바지 주머니에서 나오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버리기에 아주 당연한 행동처럼 연결되는 순간에 나는 문득 종이를 펼쳐본다. 지금으로부터 어느 정도 지난 어느 날에 내가 방문했던 곳의 흔적이 담겨있는 종이 쪼가리. 바로 영수증이다. 일상에서 영수증이란 존재는 언제나 태어나기도 전에, 그러니까 출력되기도 전에 버려드릴까요를 먼저 듣는 존재.
난 그런 영수증을 언제나 받아온다. 물론 계산이 정확하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용도로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받은 즉시 몇 번 접어 주머니에 넣는 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받아오는 이유는 딱히 없다. 오히려 그런 영수증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옷에서 빼내어 테이블에 올려두는데 그럴 때마다 쓰레기를 들고 온 기분이 들 때가 대부분이다.
어느 날에는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영수증 하나를 발견했던 적이 있다. 오래된 책이 노래지듯 노랗게 변한 영수증 안에는 4년 정도 지난 어느 날 내가 어느 동네에서 사 먹은 순댓국이 적혀있었다. 여름인 계절 8월의 어느 날, 오후 7시쯤 사 먹었던 어느 누구인지 모를 2명과 함께 순대만 들어간 순댓국 하나와 그냥 순댓국 두 개가 주문되어 있는 영수증.
난 이 영수증을 보며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억에도 없는 어느 과거의 정확한 시간대의 내가 사용한 금액과 물건의 이름. 위치 또한 찍혀있어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가 볼 수 있는 공간. 잊고 있던 나의 과거의 어느 하루가 일기처럼 출력되어 있는 종이 한 장. 이런 영수증들 사이엔 아마도 다양한 나의 과거들이 출력되어 있겠지. 어느 날의 기쁨이 있다면 어느 날의 슬픔도 존재할 것이고, 또 어느 날은 다시 만나지 못할 어떠한 인연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시간이란 게 참 신기하다. 정말 행복했던 사람들과의 순간에서도 단 2년만 지났을 뿐인데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던 어느 날의 내가 아무에게도 티 내지 않기 위해 들어갔던 문구점에서 한참을 돌고 돌아 사서 갔던 작은 물건이, 고작 1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내 앞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당시의 슬픈 감정은 언제 사라졌을까 싶은 채 그냥 물건이 되어 다른 물건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저 물건처럼.
사진과 다른 느낌으로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특정 공간이 적혀있는 과거를 회상해 볼 수 있는 존재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존재의 유무를 선택하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