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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석근 1이었으니까 1시 20분까지 도착하면 되는 거였다. 집에서 우편집중국까지의 거리는 넉넉하게 25분쯤. 

처음 가보는 초행길이기 때문에 기다려도 도착해서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40분 전에 미리 출발했다.  

 

걸음이 빨랐는지 20분도 안돼서 도착을 했다. 그래도 출입구가 어딘지 몰라 한 바퀴를 돌아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 일찍 출발하기를 잘한 듯싶었다. 동네라 해도 이렇게 우편집중국을 가운데로 한 바퀴 돌아볼 날이 언제 또 오겠냐는 생각으로 걸어봤더니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좋았다.

출입문을 발견하고 들어가 나무 밑 벤치에 앉아서 숨을 골랐다. 그때가 아마 12시 40분쯤이었을 것이다. 

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에 "쟤들은 오늘 계획이 뭘까." 궁금하다가도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대기장소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1층을 지나 2층으로 이동하고 면접 대기실에 들어갔더니 벌써 2명이 먼저 도착해있었다. 이내 사람들이 꽤 모였고, 다양한 연령대를 마주했다. 대학생들도 있었고, 30대로 보이는 분들, 40대로 보이는 분, 50대로 보이는 분들. 정말 다양했다.

 

1시 30분이 되자 응시번호 순서대로 면접실로 향했다.  면접은 개별 면접이었고, 면접관은  2명이 계셨다.

면접 시간은 대략 5분에서 10분이 걸린다 했지만, 실제로는 7분에서 20분까지 천차만별이었다. 

 

면접 질문으로는

1. 자기소개.

2. 자신의 장,단점.

3. 지원한 곳의 일은 알고 있는지.

4.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5. 최종 꿈은 무엇인지.

6. 그전에 뭘 했는지

등등 다양하게 질문해주시는데 분위기가 딱딱하지 않아서 편하게 대답하면 된다. 

 

우편집중국 알바는 시간대도 6시 반부터 11시까지라 오전, 오후에 공부하고 작디 작아진 마음을 다 잡으면서 일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굉장히 하고 싶던 알바였다. 요즘 들어 점점 축축 쳐지고 있는 나 자신이 답답해진다. 봄을 타는 건가. 

지난번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준비할 때도 4월이었는데, 아마 내게 4월은 스위치의 계절이 아닌가 싶다.

 

최종꿈이 무언지 여쭈시길래 앱 개발이라 했던 것이 잘못된 것일 까.

나는 그렇게 경쟁률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래도 내가 언제 우편집중국에 들어가 볼 날이 있을까 싶으면서 좋은 추억으로 남겨뒀다.

다음에 공고 나면 또 지원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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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류 합격을 했다. (슬픈 문장이다...)

우편집중국 홈페이지에서 우정실무원 뽑는 공고 조회수가 1400이 넘어가길래 알바몬에서만 사람을 뽑고 있던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 면접도 안 부를 수도 있겠구나 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보니까 서류를 넣은 사람들은 다 합격한 것 같다. 1명 뽑는데 경쟁률이 이렇게 치열한 게 맞는 건가. 기간도 딱 한 달인데.

세상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경기를 몸소 느껴본다.

석근3할껄. 그럼 6명 뽑으니 합격률도 꽤 높았을 텐데. 

이제 면접을 가야 된다. 

 

근데 우체국은 면접복장을 어떻게 입고 가야 되는 걸까. 정장은 아닐 거 같은데 또 정장일 거 같기도 하고 일단 목요일이 되기 전까지 잘 생각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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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이 하고 싶어 알바몬을 뒤적거리다 찾게 된 알바이다. 3월 31일 오후 6시까지 지원가능한 데 3월 31일 오후 4시 20분에 찾았다.

 

쿠팡 같은 곳은 가족들이 전부 반대를 해서 못해도 우체국정도면 괜찮지 않을 까란 생각으로 일단 응시 원서들을 체크했다. 

제출 서류

"응시원서, 이력서, 자기소개서, 개인정보 수집, 이용 동의서, 범죄사실 부존재확인서, 공정채용확인서"였다.

일단 서류만 봐도 꽤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그래도 뭐가 됐든 가장 중요한 건 자기소개서겠지.

자기소개서에도

"지원동기, 생활신조와 가치관, 본인의 장, 단점, 주요 경력 및 특기 사항, 만일 우정실무원으로 근무하게 된다면."

이라는 구체적인 큰 제목들이 적혀있었다.

열심히 쓰고 제출했는데 6시 이후에 다시 보니 "위해"를 써야 됐는데 "해위"라고 작성한 것을 보았다.

하, 뭐 저런 실수를 했지. 과연 이걸 읽고도 내가 면접을 보러 갈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가서, 어차피 될 데로 되라는 마인드로 중근을 선택해서 지원을 했다가 지역번호로 시작하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전화를 안 받고 더콜에 번호를 찍어보았는데 우편집중국이라 하길래 두 번째 전화 오는 것을 바로 받았다. 
통화 내용은 간단했다.
중근은 여자가 하기 너무 무거운 일이 많아서 정말 중근으로 지원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연락은 준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란 생각으로 다른 곳은 여자가 하기 가능하냐 물었더니 가능하다 해서 빠르게 수정해서 다시 제출하겠다 했다. 그쪽에서도 빠르게 수정해서 기간 안에 올려주셔야 한다 했다.  
전화받은 그때가 5시 41분이었다. 말 그대로 6시 전에 마지막으로 문 닫고 지원하게 된 것이었다. (이때라도 자기소개서 한 번만 더 읽어볼걸. 그랬으면 저 잘 못쓴 글씨를 봤을 텐데.)


위의 사진으로만 보면 중근이 그렇게 힘든 업무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표였는데 응시번호를 받고 깨달았다.
"석근1_08"
지원한 모든 사람들이 다 무거운 걸 피했구나.
저 응시 뒷 번호만 두고 보면 석근 1자리에 1명을 뽑는데 8명이 지원했나 보구먼 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알바몬에 나와있는 지원자 통계를 보면 대략 11명 정도가 지원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거기서도 무려 8명이 이곳으로 지원을 한 건가라는 생각에 잠길 때쯤 이것도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이력서와 같이 있던 첨부 파일에서 이런 문구를 찾았다.
 

 
다.를 읽다가 사.를 읽어보니

채용인원보다 응시 인원이 부족하면 지원 안 한 곳으로 지원한 사람들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 같은데.. 과연 소포는 많이 무거운 것일까 라는 생각과 함께 어차피 한 달 정도라면 그냥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알바에서도 경쟁률이 엄청나구나라는 현실은 눈물은 안 났지만 눈물이 흐르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적인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하루였다.
 
아마도 내가 지금까지 너무 편한 길만 찾다가 이제 편한 길들은 다 걸어오고 어려운 길들 만 남은 것이겠지라는 마음으로 모든 게 다 내 선택이었다면 받아들이자는 마음이 크다. 
 
봄도 오고 꽃도 폈고, 그러다 갑자기 눈도 오고 계절이 아주 다양하게도 돌아가는데 그사이 나도 뭔가 바뀔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도전해 봤다. 부디 결과가 좋았으면 좋겠다.
 
4월 1일에 서류 합격 발표하고 4월 3일에 면접을 보는 것 같던데.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일을 안 해보니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다.
마침 위치도 엄마랑 항상 운동가는 곳 가운데 있는 곳이라 밤에 끝나도 그렇게 걱정 안 할 것 같은 위치라 더 끌린다.
아직 부모님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4월 7일(월)부터 5월 6일(화)까지 월~금 알바 정도면 새로운 시도에도 불안하지 않을 기간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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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훈 : 미래를 위한 준비, 때는 지금이다.
 
++
2024.04.08 - 2024.06.05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던 나의 도전이 드디어 끝이 났다.
 
4월 8일 아침 8시 40분까지 오라는 문자를 받고, 나는 요양 보호사 교육원을 들어갔다. 문 앞 바로 앞자리, 선생님도 실습 현장도 바로 볼 수 있는 사실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기 위해 남들보다 더 빠르게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나의 동기들이 하나둘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첫날이라 다른 날 보다 특별했던 건 앞으로 우리가 배울 내용이 담긴 교재를 받았다는 건데, 바로 내 앞 공동 테이블에서 한 권씩 가져갈 수 있게 놓여 있었다. 으레 짐작은 했지만 내 또래의 젊은 사람은 없었다. 지난번 기수에는 20대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번 기수의 내 동기들은 내가 제일 젊었고 이후  4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다. 나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80만원 정도의 돈을 내고 교육원을 등록했다.
최근 뉴스들을 통해 AI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에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가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요양보호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마침 기사 바로 밑에 있던 기사가 고령화 시대였던 것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취업 준비를 하다가 너무 나태해진 내자신이 꼴도 보기 싫어서 뭐라도 생산적인 것을 배워보자는 마음이 제일 컸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상황으로 나는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돈이 나가지 않을 수 있는 선에서 학원을 알아보았다.
1. 차비가 안나올 수 있게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가.
2.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집으로 올 수 있는 거리인가.
3. 내 소중한 돈을 써도 될 정도로 믿을 만한 교육기관인가.
4. 내 소중한 시간을 들이기에 망설일 틈 없이 최대한 빠르게 수업이 개강하는 가.
 
이 정도의 상황에서 맞는 곳을 찾기엔 굉장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추측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선택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2024년이 시작되면서 국비지원이 대폭 감소했기 때문이었는데(2023년까지만 해도 55% 정도 지원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10% 지원.) 그 결과 개강 인원이 채워지지 않은 많은 요양보호사 교육원들이 개강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5년 인증 우수기관으로 인증된 교육기관이 우리집에서 20분 정도만 걸어가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경기도에 살면서 걸어서 20분 정도면 가까운 편이라 생각했던 나는 꽤 조건에 맞는 이 기관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아주 특이한 문구가 내 눈에 들어왔다. 점심에 갓 지은 따끈한 쌀밥을 준다는. 뭐지. 이건?
처음엔 왜 밥을 학원에서 주는 것일까란 의문이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의문이 풀렸다. 아마 이 자격증을 준비하는 연령층이 우리 엄마 나이 때정도라 학원에서 밥을 주면 반찬만 싸서 오면 점심이 해결되니 꽤 매력 있는 솔깃함이었을 것 같다. 나 또한 이 문구에서 집까지 못 걸어오겠으면 학원에서 밥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른 학원들 보다 10만원 정도 비싼 등록비였는데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교육원을 바로 찾아갔다. 네이버 지도에서만 봤을 땐 초행길일 거라 생각했던 가는 길이 항상 밤마다 운동하러 지나갔던 그 길이란 걸 알고 묘하게 운명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익숙한 건물외관에서 낯선 내부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들어갔다.  살짝 열린 교실에서 선배 기수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 보면 쉬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수업을 듣는데 이 정도로 밝을 수 있다면 여긴 충분히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그날 다른 학원보다 10만원 정도 더 비싼 등록비를 지불하고 등록하고 나왔다.  
 
두근 두근한 마음으로 친구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일단 수업을 기다렸다.
수업을 시작하니 가장 만족했던 변화가 바로 아침 일찍 일어나는 나 자신이었다. 9시 전에 도착해서 비콘과 출석을 해야 했기에 7시 40분쯤엔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집에서 교육원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20분이면 되는 거리에 있기에 산책하는 마음을 가지고 출발하면 딱이었다. 경우의 수가 있다면 가는 길에 신호등이 3개나 있는 점이었다. 나는 살짝의 낯을 가리기에 점심은 집으로 와서 먹기로 결정하고 점심시간마다 집으로 뛰어 왔다. 낯가림이 끝날 때쯤엔 엄마와 밥을 먹기 위해 뛰어 왔다. 수업을 배우던 중 어르신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이 함께 밥을 먹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로운 마음이 그 정도로 큰 것일까 하다가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도 밥을 혼자 먹기 싫을 것 같았다. 인간은 진화의 동물이라 하지 않았는가. 20분이 15분 되고 15분이 11분이 되는 기염을 토할 하체 근력을 얻었다. 그리고 집에 오니까 이상하게 힘들었던 게 싹 사라지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엄마 버프가 아니었나 싶다.
 
5년 인증 우수기관이였던 우리 교육원은 정말 엄청난 공부량을 가지고 있었다. 시험을 무슨 일주일에 3, 4번을 보는데 나중엔 8번인가 봐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이게 맞아?" 싶더라니까. 젊은 나도 이런데 내 소중한 동기들은 더 힘들어했다. 시험을 보고 일정 범위를 넘기지 못하고 틀리면 재시험도 보는데 은근히 이걸로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누가 요양보호사 쉽게 따는 거라 했어.
그래도 이 막대한 시험을 통해 문제를 거의 외우다 싶이 할 수 있었고 우리 기수 모두 한 번에 자격증 시험을 통과했다.
 
이론수업도 배우고 실습수업도 배우고 나면 진짜 현장으로 가는 실습만이 남게 되는데, 요양원 5일, 재가 5일을 가게 된다.
재가에는 주간보호센터 3일과 직접 어르신 집에 가는 재가방문요양 2일로 나뉜다. 사람마다 5일 내에서 나눠지는 일수는 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보통 실습은 둘씩 간다. 혼자도 가는 것 같지만 나의 경우는 모든 실습에 파트너 동기가 있었다. 그 덕에 마음이 훨씬 편안하게 실습을 할 수 있었다.
실습을 통해 느낀 점은 그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르신들의 감정이였던 것 같다. 나는 살면서 노인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한 적이 있었을까? 참 못났던 과거의 나였다. 모두가 지나갈 그 길에 대해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도 배움을 통해 지금은 조금 더 달라진 나를 얻게 된 것 같다.
 
실습에서 몇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일단 요양원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침대에 누워 계시며 티비 광고 소리에 맞춰서 손으로 리듬을 타고 계셨던 어르신이 제일 먼저 기억이 난다.(키위 광고였던 것 같다.) 물론 이 어르신께 식사도움과 간식 도움을 하면서 애착이 생겨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르신이 웃으면 나도 모르게 같이 미소가 지어졌던 좋은 기억이 있다.
또 하나는 남자 어르신이였는데 내가 옷수납장을 정리해 드리니 고맙다며 레쓰비를 주셨던 것.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가 받게 된 레쓰비는 지금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진짜 감동적인 상황이었는데 치매 어르신께서 바닥에 침을 뱉는 습관을 가지고 계신 분이 계셨었다. 그런데 내가 지나가니까 잠깐 멈추셨었다. 찰나였지만 어르신이 나를 보고 침을 안 뱉었다는 게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아마 아무도 그때의 내 감정은 모를 것이다.
웃겼던 기억도 있다. 뜨거운 물이나 음료를 드릴 때 반드시 찬물을 섞어서 온도를 조절해서 드려야 하는 것을 수업에서 배웠기에 어떤 어르신께서 커피를 타달라 하셔서 적당한 온도에 맞춰 드렸다가 "다시" 소리를 들었다. 너무 찬물을 많이 섞었나 하고 조금 덜 섞어서 다시 드렸다가 들켰다. 뜨거운 물로만 탄게 맞냐며 추긍하셨지. 모른 체 하면서 있다가 또다시 "다시"를 듣고 진짜 조금만 찬물을 넣어 다시 만들어 드렸다가 또다시 실패했었다. 어르신 목에 과연 이게 괜찮은 걸까 싶어 슬쩍 지나가는 선생님께 물어보았다 정답을 들었다. "이 어르신은 뜨거운 물에 타서 전자레인지에 약간 더 돌려드려야 해요."
어르신은 내가 얼마나 답답하셨을 까. 다시 타드리고 만족하시는 어르신의 얼굴을 보고 역시 배움과 경험은 다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묘하게 그렇게 뜨거운 걸 잘드시는 어르신의 목을 걱정하고 있던 내 모습이 웃겼던 날이었다.
주간보호센터에서는,
첫날부터 계속해서 나를 보고 계신 어르신이 계셨다. 슬쩍 가서 말벗을 해드리려고 갔다가 따뜻한 말을 들었다. 일이 없을 땐 앉아야 된다고, 그러다 무릎 다 나간다며 내 손을 잡아끌어 옆에 앉혀주셨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다음 날에 나를 보자마자 손짓을 하며 이리 와보라 하셨다. 가봤더니 어르신이 손에 꼭 쥐고 계셨던 사탕을 나에게 주셨다. 나 주려고 가져오셨다며 활짝 웃으시길래 나 또한 웃음이 낫다. 그러다가 오후에 어르신께 가서 사탕 잘 먹었다 했더니 기억을 못 하셨다. 그 순간 마음이 너무 아팠다.
또 다른 어르신은 파킨슨 병을 앓고 계셨는데 내가 아파하실 때 옆에서 도움을 드렸던 걸 기억하고 괜찮아지시자마자 나에게 오셔서 끌어안아주셨던 것.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을 참 많이 느꼈다.
마지막 재가에서는, 
치매가 있으신 어르신 집에 가서 집청소도 하고 말벗도 해드리며 함께 있었는데 어르신이 고스톱을 좋아하 신다 하셨다. 치매선생님도 오시고 고스톱 모양의 퍼즐도 맞추어 보시다가(고스톱 광 모양 퍼즐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어르신이 고스톱을 치시고 싶어 하시길래 같이 간 동기 선생님과 함께 게임에 참가했다. 앞서 퍼즐 모양도 고스톱 모양이었던 고스톱을 사랑하는 어르신께 고스톱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며 게임을 시작했다. 나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에 대해 알려주시는 게 좋으셨는지 계속 자신한테 패를 보여줘 보라 하시면서 자세히 알려주셨다. 그리고 꼭 말 끝에 절대 친구들이랑은 돈을 놓고 고스톱 치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주의를 주셨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게임을 하다가 연속해서 내가 이길 때가 있자 이게 바로 초심자의 행운인가 보다고 얘기하며 좋아했더니 어르신도 좋아하셨다. 그렇게 하나하나 알아갈 때쯤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같이 갔던 동기선생님과 치매 선생님과 어르신은 모를 만한 사실 하나가 있다. 사실 난 고스톱을 할 줄 안다. 핸드폰에 앱도 깔았던 고스톱게임. 게임 머니였지만 몇억씩 따고 좋아했던 때가 있었지. 연달아 이겼을 때 아차 싶어 다시 모른 척을 하면서 게임을 했었다. 그래도 어르신이 좋아했으니 거짓말이라도 선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습 때의 어르신들이 어제의 기억처럼 생생하게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만큼 나에게 좋았던 기억이었던 것 같다.
실습 마지막 날 어르신들이 건강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의 실습에 마침표를 찍었다.
 
내 소중한 동기. 나와 함께 실습을 나간 동기와 나의 나이차이는 무려 40살 정도였다. 이 부분이 놀랍고도 감사한 게 사실 나는 40살의 나이차이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나의 동기가 내게 해준 배려 덕분이지 않았을까. 하시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엄마가 스쳐 지나가서 더 귀여웠다. 어르신께 귀엽다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너무 귀여우셨는 걸. 힘들 때도 즐거울 때도 같이 있다 보니 지금도 가끔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언제 내가 40대, 50대, 60대, 70대의 사람들과 같이 수업을 들어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 생각해도 참 잘 선택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실습 장소에서 만난 요양보호사님들이 하나같이 20년 후에 다시 오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금은 더 해보고 싶은 거 해보다가 나중에 다시 오라고. 그때 다시 만나자고 말씀해 주셔서 마음이 찡했다. 나에게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딸 수 있게 만들어 줬던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참 소중하게 남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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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게 무언가를 시작했다.

아직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무언가를!

과연 내 인생의 중심에서 이 선택을 통해 어떤 방향으로 흘러들어 갈지 걱정이 앞서는 상황이다.

약간의 궁금증 정도 또한 갖게 되었다.

산다는 게 뭘까. 로또나 당첨됐으면 좋겠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좋은 쪽으로만 길을 안내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시작을 통해 또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성장해 있을 테니 도전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지.

친구들한테는 아주 나아아아아중에 알려줘야겠다.

나의 현 상태를 100으로 놓고 생각해 본다면 걱정이 90, 무서움이 10이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주변에 꽃도 피었던데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간은 왜 항상 일을 하면서 살아야 될까.

만약 일을 하게 되면 노동력의 기준은 도대체 누가 잡는 걸까.

수목원에 심어진 나무가 되고 싶다. 맑은 공기나 마시면서 바람이나 즐기고 싶다.

 

설렘이나 기대는 1도 없는 현 상태에서, 미래를 위해 선택한 이 길에서

나 잘해볼 수 있겠지.

 

2024.3.27.21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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