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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낮 10시 반에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고 왔다.

엄마는 유독 로마가 배경인 영화들을 좋아한다.

가족여행으로 다녀왔던 로마 여행에서도 제일 설레 보였던 것은 아마도 엄마 아빠 젊었을 적 보았던 영화들의 이유가 크지 않을 까를 생각한다. 특히나 콜로세움 앞에서의 부모님의 얼굴은 그때의 여행에서 통틀어 제일 행복해 보였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사담이지만 부모님과 로마여행을 간다면 벤츠투어를 추천한다. 다리도 안아프고 곳곳을 둘러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혹시나 부모님이 음식이 입에 안 맞아하신다면 길거리에서 파는 군밤과 생과일 컵을 보일 때마다 사두는 것도 추천한다. 안 맛있을 수가 없다.

 

요즘 나와있는 영화들이 엄청나게 다양한데, 그 많은 영화들 사이에서 콕 찝어 이 영화를 보고 싶다 하신 것도 참 귀여웠다.

잔인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엄마가 이 영화를 선택한 부분에서 난 조금 놀라웠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ㅎㅎㅎ

이상하게 누군가가 칼에 베일 때마다 엄마가 과자를 먹는 게 아닌가. 나중에 물어보니 피가 나오는 게 너무 싫어서 아래를 보다가, 그저 아래에 있던 과자를 보고 손이 간 것이었다. 그게 계속되니 그 타이밍 때마다 과자를 드신 것인데 전후 사정을 모르는 내 입장에선 약간 무서웠다.ㅋㅋ

영화가 3시간이라 하길래 혹시나 입이 구준할까 싶어 가져갔던 과자에서 나홀로 오싹함을 느껴버린 것이다.

 

그렇게 오싹 오싹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자꾸 밝은 핸드폰 화면이 빛을 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영화를 선택한 연령층들은 대체적으로 엄마 아빠 나이 때였는데 우리 바로 옆에 앉아 계신 분들은 무려 3시간을 내내 핸드폰을 켜두었다. 나중엔 무얼 하는지 궁금해서 봤다가 엄마와 나는 그냥 영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유는 바로 게임을 하시고 계셨기 때문인데. ㅎㅎ 그 옆에 분은 화면이 너무 밝아서 도저히 뭘 하고 계신 건지도 못 봤다. 우리 동네 영화관은 전부다 리클라이너관으로 바뀌어서 이제는 앞사람이 핸드폰해도 상관없겠다 싶었는데 오늘로써 옆사람은 해결이 안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모든 일들이 있었지만 영화가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다행히 그 모든  상황을 뒤로 하고 영화에 몰입돼서 보고 나왔다. 정말 별생각 없이 봤는데 내가 제일 재밌게 본 것 같았다. 엄마는 1편이 더 재밌다면서 나중에 한번 봐보라 하셨다.

아마도 난 1편도 찾아 볼 것 같다. 어쩌면 로마에 대해서도 흥미가 좀 생긴 것 같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도 아마 엄청 좋아할 텐데 이제 거의 막을 내리고 있는지 예매할 시간대가 좀처럼 맞지 않았다.

퓨리라도 재개봉한다 해서 아쉽지만 그거라도 예매해둘까 싶다. 

 

내가 엄마, 아빠 나이가 되었을 때, 나의 젊었을 때를 생각하며 기억할 영화들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나 홀로 집에 시리즈, 해리포터 시리즈, 폴라익스프레스 같은 산타가 나오는 영화들인데 먼 훗날 아직까지는 존재의 유무도 확인할 수 없는 나의 아이들에게 이 영화들을 추천해 준다면 과연 오늘날 내가 엄마, 아빠한테 추천을 받았을 때 느꼈던 "멋"을 보일 수 있을까.

결부터가 다르니 난 아무래도 초등학생 때쯤 같이 보는 걸로 노선을 선택해야겠다. 그때라면 과연 최고의 선택일 듯하다.

 

고전 영화들은 대체로 나에겐 흑백 영화들로 기억된다. 어렸을 적에 학교 음악시간에 틀어주던 고전 영화들을 기억하는가. 그때 당시 수업이 끝난 후 자투리 시간에 보여주던 거라 짧으면 10분, 길면 20분쯤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별로 재미도 없었을 내용들이 더욱 재밌게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감칠맛 같은 흑백 영화들이었다. 그때 이후로는 다시 찾아보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고전 영화들을 찾아서 봐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재밌는 고전영화 하나 찾아서 나중에 내 아이에게 소개해주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달까. 왜인지 "멋"에 집착하는 나일까 싶기도 했다.

이렇게 집착하는 모습에서 보았을 때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더도 말고 우리 부모님 같은 부모가 되고 싶다. 그렇게 되면 내 자식들도 꽤나 행복하게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그래서 우리 가족이 더, 더 행복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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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왔다. 그제 밤부터 하늘이 흐리기 시작하더니 어제 아침이 되자 온 세상이 눈 속에 덮여 하얀 세상이 되어있었다. 나무에는 눈꽃이 피었고, 땅과 건물들에는 추위에도 녹지 않는 눈이불이 덮였다. 말 그대로 세상이 눈 속에 있었는데 첫눈이 이렇게 커다랗게 온건 정말 오랜만이라 보고만 있어도 참 행복했다. 

이제 슬슬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구나라는 느낌이 날 더 즐겁게 만들었다. 수정볼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어느새 밖에는 또다시 눈이 내렸다.

 

"역시 눈이 내리는 날엔 핫초코지."라는 생각으로 지난번 이마트에서 사둔 미떼를 꺼냈다. 뜨거운 물에 미떼를 녹여주고 우유를 넣고 다시 저어서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주면 맛 좋은 핫초코가 탄생한다. 이렇게 탄 핫초코를 들고 베란다에 나가 첫눈의 흔적과 함께 계속해서 오고 있는 눈송이들을 한동안 구경했다. 여기에 이불이라도 하나 들고 오면 딱일 텐데라는 생각을 하던 중 이전에 내가 베란다에서 자보겠다고 도전했던 날이 생각이 났다.

 

그런 날들이 있다. 계절마다 해볼 수 있는 삶의 체험 현장.

유독 겨울을 좋아해서 그런지 나는 겨울에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삶의 체험 현장이라 해서 웅장한 것이 아니다. 가령 한겨울에 황토 맨발 걷기 하기나 베란다에서 자보기 같은 1박 2일에서 나올 법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황토 맨발걷기를 할 수 있는 공원들에서 한겨울에 사람들이 걷지 않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왤 까"란 생각으로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걸어봤다. 우리 가족들은 그런 나를 보고 "그래, 해봐라"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공원 옆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 처음엔 양말을 벗고 얼어있는 땅에 발이 닿으니 약간의 한기가 느껴졌다. 황토가 얼어있었다. 걸어봤다. 발바닥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순식간에 내 따뜻했던 발바닥이 냉골의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시작을 해봤으니 한 바퀴는 돌아봐야 지란 생각을 가지고 빠른 스피드로 빠른 걷기를 시작했다. 다 걷고 난 다음 발을 물로 씻어야 됐는데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양말을 신고 집에 와서 따뜻한 물로 발을 씻었다. 집에 돌아오던 길 내내 우리 가족들은 나를 걱정하면서도 도대체 그걸 왜 해봐야 아냐고 타박을 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그 후로 나는 겨울이 되거나 좀 추워질 때 공원을 산책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의 내가 생각난다. 사람들도 아마 어쩌면 해봤다가 이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일 지도 모른다. 

 

베란다에서 자보기를 한 날은 유독 뉴스에서 한파 주의를 외치던 날이었다.

겨울중에서도 가장 추운 겨울에 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지라 뉴스에서 속보같이 떠있는 한파주의 단어를 보자마자 "오늘이다!"를 생각했다. 엄마, 아빠께 오늘은 밖에서 자볼 것이라 이야기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전에 나의 형제는 고등학교 때 자신의 선교부 선배의 수능을 응원하기 위해 선배가 수능을 보는 학교 앞에서 강제로 강 추위 속에서 노숙을 한 경험이 있다. 그는 나를 보며 왜 사서 고생을 하냐는 눈빛을 보냈다. 엄마, 아빠는 그때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냉장고 박스와 신문지, 침낭을 챙겨 나의 형제에게 집을 만들어 주었던 경력이 있다. 그때의 그 사건은 사실 학교 선배들의 강압적 태도 안에서 이뤄진 거라 자발적인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더 추위를 느꼈던 것 같았었다. 내 일이 아닌 해프닝이었기에 나 또한 얼마나 추운지 궁금했었던 마음이 컸다.

엄마, 아빠는 그날도 여기서 침낭 깔고 자다가는 얼굴이 돌아간다며 몇 가지만 해줄 테니 그 위에서 자라하셨다. 난 뭐 얼마나 달라질까를 생각했지만 부모의 사랑은 위대했다. 어째서인지 베란다 창문과 문에 김서림이 끼기 시작했다. 난 베란다에 누워 창문 밖 별을 보고자 했던 것인데 왜 저렇게 하얀 베란다가 되어있을까 싶어 나가 봤다. 바닥엔 우리 집에 있었는지도 모를 두꺼운 돗자리부터 시작해서 이불 요 매트 + 이불 + 침낭 + 파쉬 물주머니 여러 개. 원래라면 베란다에 가면 코가 시린데 그때는 집안보다 베란다가 더 따뜻했다. 뭔가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잠자리였지만 그래도 베란다에서 자보기가 주 포인트였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자보려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바닥이 많이 깔려있는 것인지 내 침대만큼 폭신했다. 이게 바로 가족의 사랑인가 싶었는데 가족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었다.

잠을 자다 너무 더워서 뒤척이다 눈이 떠졌는데 누군가가 날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정말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 보니 엄마와 아빠가 베란다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밖에서 자겠다는 나를 말리기엔 내 행동이 너무 완강했고, 그렇게 내버려 두자니 내가 얼어 죽을까 봐 걱정이 되셨던 것이었다. 그 새벽에 우리는 서로 놀랐지만 그만큼 웃었다. 다음날 아침 여전히 뽀얀 창문들을 보며 잠에서 깼다. 역시나 나름 재밌었던 기억이다.

 

어제는 엄마와 밤 산책을 갔었는데, 엄마가 나무들마다 한가득 눈이 쌓여있는 걸 보고 "눈이 많이 쌓여있으면 나무들이 무거울꺼야"라는 말과 함께 어디서 찾아왔는지 모를 긴 나뭇가지로 나무들을 털어주었다. 키가 닿지 않는 곳엔 점프를 하면서 털어주었는데 그 모습이 참 귀여웠다. 슬쩍 내 뒤에 와서 나에게 눈벼락을 맞게 하기 전까지 난 엄마의 따스함에 감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눈도 맞고, 밟으면서 뽀독 뽀독 소리도 들으며 산책을 하니 슬슬 생각나는 게 있지 뭔가. 

 

한겨울에 붕어빵은 못참지.

붕어빵 파는 아줌마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다 드디어 찾아서 팥붕어빵 4개를 샀다. 아주머니께서 갓 만든 거라 아마 한입 먹으면 잊지 못할 거라 하시길래 두근거림은 배가 되었다. 무엇보다 여기 붕어빵은 아직 2개에 1000원이었다. 감사합니다의 인사와 함께 가장 맛있게 생긴 붕어빵을 엄마한테 주고 나도 하나 꺼내 먹었다. 엄마와 동시에 눈이 마주쳤고 우린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붕어빵 두 개를 더 사 왔다. 그 사이 붕어빵아주머니는 줄이 길게 늘어나있었다. 모두가 한마음이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다 들리도록 너무 크게 맛있다를 외쳤던 것 같기도 하다. 

역대급으로 만족했던 붕어빵을 먹으면서 신나게 집으로 향했다. 겨울의 시작이 아주 좋다!

붕어빵은 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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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훈 : 미래를 위한 준비, 때는 지금이다.
 
++
2024.04.08 - 2024.06.05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던 나의 도전이 드디어 끝이 났다.
 
4월 8일 아침 8시 40분까지 오라는 문자를 받고, 나는 요양 보호사 교육원을 들어갔다. 문 앞 바로 앞자리, 선생님도 실습 현장도 바로 볼 수 있는 사실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기 위해 남들보다 더 빠르게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나의 동기들이 하나둘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첫날이라 다른 날 보다 특별했던 건 앞으로 우리가 배울 내용이 담긴 교재를 받았다는 건데, 바로 내 앞 공동 테이블에서 한 권씩 가져갈 수 있게 놓여 있었다. 으레 짐작은 했지만 내 또래의 젊은 사람은 없었다. 지난번 기수에는 20대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번 기수의 내 동기들은 내가 제일 젊었고 이후  4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다. 나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80만원 정도의 돈을 내고 교육원을 등록했다.
최근 뉴스들을 통해 AI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에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가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요양보호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마침 기사 바로 밑에 있던 기사가 고령화 시대였던 것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취업 준비를 하다가 너무 나태해진 내자신이 꼴도 보기 싫어서 뭐라도 생산적인 것을 배워보자는 마음이 제일 컸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상황으로 나는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돈이 나가지 않을 수 있는 선에서 학원을 알아보았다.
1. 차비가 안나올 수 있게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가.
2.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집으로 올 수 있는 거리인가.
3. 내 소중한 돈을 써도 될 정도로 믿을 만한 교육기관인가.
4. 내 소중한 시간을 들이기에 망설일 틈 없이 최대한 빠르게 수업이 개강하는 가.
 
이 정도의 상황에서 맞는 곳을 찾기엔 굉장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추측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선택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2024년이 시작되면서 국비지원이 대폭 감소했기 때문이었는데(2023년까지만 해도 55% 정도 지원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10% 지원.) 그 결과 개강 인원이 채워지지 않은 많은 요양보호사 교육원들이 개강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5년 인증 우수기관으로 인증된 교육기관이 우리집에서 20분 정도만 걸어가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경기도에 살면서 걸어서 20분 정도면 가까운 편이라 생각했던 나는 꽤 조건에 맞는 이 기관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아주 특이한 문구가 내 눈에 들어왔다. 점심에 갓 지은 따끈한 쌀밥을 준다는. 뭐지. 이건?
처음엔 왜 밥을 학원에서 주는 것일까란 의문이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의문이 풀렸다. 아마 이 자격증을 준비하는 연령층이 우리 엄마 나이 때정도라 학원에서 밥을 주면 반찬만 싸서 오면 점심이 해결되니 꽤 매력 있는 솔깃함이었을 것 같다. 나 또한 이 문구에서 집까지 못 걸어오겠으면 학원에서 밥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른 학원들 보다 10만원 정도 비싼 등록비였는데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교육원을 바로 찾아갔다. 네이버 지도에서만 봤을 땐 초행길일 거라 생각했던 가는 길이 항상 밤마다 운동하러 지나갔던 그 길이란 걸 알고 묘하게 운명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익숙한 건물외관에서 낯선 내부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들어갔다.  살짝 열린 교실에서 선배 기수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 보면 쉬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수업을 듣는데 이 정도로 밝을 수 있다면 여긴 충분히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그날 다른 학원보다 10만원 정도 더 비싼 등록비를 지불하고 등록하고 나왔다.  
 
두근 두근한 마음으로 친구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일단 수업을 기다렸다.
수업을 시작하니 가장 만족했던 변화가 바로 아침 일찍 일어나는 나 자신이었다. 9시 전에 도착해서 비콘과 출석을 해야 했기에 7시 40분쯤엔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집에서 교육원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20분이면 되는 거리에 있기에 산책하는 마음을 가지고 출발하면 딱이었다. 경우의 수가 있다면 가는 길에 신호등이 3개나 있는 점이었다. 나는 살짝의 낯을 가리기에 점심은 집으로 와서 먹기로 결정하고 점심시간마다 집으로 뛰어 왔다. 낯가림이 끝날 때쯤엔 엄마와 밥을 먹기 위해 뛰어 왔다. 수업을 배우던 중 어르신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이 함께 밥을 먹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로운 마음이 그 정도로 큰 것일까 하다가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도 밥을 혼자 먹기 싫을 것 같았다. 인간은 진화의 동물이라 하지 않았는가. 20분이 15분 되고 15분이 11분이 되는 기염을 토할 하체 근력을 얻었다. 그리고 집에 오니까 이상하게 힘들었던 게 싹 사라지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엄마 버프가 아니었나 싶다.
 
5년 인증 우수기관이였던 우리 교육원은 정말 엄청난 공부량을 가지고 있었다. 시험을 무슨 일주일에 3, 4번을 보는데 나중엔 8번인가 봐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이게 맞아?" 싶더라니까. 젊은 나도 이런데 내 소중한 동기들은 더 힘들어했다. 시험을 보고 일정 범위를 넘기지 못하고 틀리면 재시험도 보는데 은근히 이걸로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누가 요양보호사 쉽게 따는 거라 했어.
그래도 이 막대한 시험을 통해 문제를 거의 외우다 싶이 할 수 있었고 우리 기수 모두 한 번에 자격증 시험을 통과했다.
 
이론수업도 배우고 실습수업도 배우고 나면 진짜 현장으로 가는 실습만이 남게 되는데, 요양원 5일, 재가 5일을 가게 된다.
재가에는 주간보호센터 3일과 직접 어르신 집에 가는 재가방문요양 2일로 나뉜다. 사람마다 5일 내에서 나눠지는 일수는 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보통 실습은 둘씩 간다. 혼자도 가는 것 같지만 나의 경우는 모든 실습에 파트너 동기가 있었다. 그 덕에 마음이 훨씬 편안하게 실습을 할 수 있었다.
실습을 통해 느낀 점은 그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르신들의 감정이였던 것 같다. 나는 살면서 노인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한 적이 있었을까? 참 못났던 과거의 나였다. 모두가 지나갈 그 길에 대해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도 배움을 통해 지금은 조금 더 달라진 나를 얻게 된 것 같다.
 
실습에서 몇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일단 요양원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침대에 누워 계시며 티비 광고 소리에 맞춰서 손으로 리듬을 타고 계셨던 어르신이 제일 먼저 기억이 난다.(키위 광고였던 것 같다.) 물론 이 어르신께 식사도움과 간식 도움을 하면서 애착이 생겨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르신이 웃으면 나도 모르게 같이 미소가 지어졌던 좋은 기억이 있다.
또 하나는 남자 어르신이였는데 내가 옷수납장을 정리해 드리니 고맙다며 레쓰비를 주셨던 것.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가 받게 된 레쓰비는 지금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진짜 감동적인 상황이었는데 치매 어르신께서 바닥에 침을 뱉는 습관을 가지고 계신 분이 계셨었다. 그런데 내가 지나가니까 잠깐 멈추셨었다. 찰나였지만 어르신이 나를 보고 침을 안 뱉었다는 게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아마 아무도 그때의 내 감정은 모를 것이다.
웃겼던 기억도 있다. 뜨거운 물이나 음료를 드릴 때 반드시 찬물을 섞어서 온도를 조절해서 드려야 하는 것을 수업에서 배웠기에 어떤 어르신께서 커피를 타달라 하셔서 적당한 온도에 맞춰 드렸다가 "다시" 소리를 들었다. 너무 찬물을 많이 섞었나 하고 조금 덜 섞어서 다시 드렸다가 들켰다. 뜨거운 물로만 탄게 맞냐며 추긍하셨지. 모른 체 하면서 있다가 또다시 "다시"를 듣고 진짜 조금만 찬물을 넣어 다시 만들어 드렸다가 또다시 실패했었다. 어르신 목에 과연 이게 괜찮은 걸까 싶어 슬쩍 지나가는 선생님께 물어보았다 정답을 들었다. "이 어르신은 뜨거운 물에 타서 전자레인지에 약간 더 돌려드려야 해요."
어르신은 내가 얼마나 답답하셨을 까. 다시 타드리고 만족하시는 어르신의 얼굴을 보고 역시 배움과 경험은 다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묘하게 그렇게 뜨거운 걸 잘드시는 어르신의 목을 걱정하고 있던 내 모습이 웃겼던 날이었다.
주간보호센터에서는,
첫날부터 계속해서 나를 보고 계신 어르신이 계셨다. 슬쩍 가서 말벗을 해드리려고 갔다가 따뜻한 말을 들었다. 일이 없을 땐 앉아야 된다고, 그러다 무릎 다 나간다며 내 손을 잡아끌어 옆에 앉혀주셨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다음 날에 나를 보자마자 손짓을 하며 이리 와보라 하셨다. 가봤더니 어르신이 손에 꼭 쥐고 계셨던 사탕을 나에게 주셨다. 나 주려고 가져오셨다며 활짝 웃으시길래 나 또한 웃음이 낫다. 그러다가 오후에 어르신께 가서 사탕 잘 먹었다 했더니 기억을 못 하셨다. 그 순간 마음이 너무 아팠다.
또 다른 어르신은 파킨슨 병을 앓고 계셨는데 내가 아파하실 때 옆에서 도움을 드렸던 걸 기억하고 괜찮아지시자마자 나에게 오셔서 끌어안아주셨던 것.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을 참 많이 느꼈다.
마지막 재가에서는, 
치매가 있으신 어르신 집에 가서 집청소도 하고 말벗도 해드리며 함께 있었는데 어르신이 고스톱을 좋아하 신다 하셨다. 치매선생님도 오시고 고스톱 모양의 퍼즐도 맞추어 보시다가(고스톱 광 모양 퍼즐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어르신이 고스톱을 치시고 싶어 하시길래 같이 간 동기 선생님과 함께 게임에 참가했다. 앞서 퍼즐 모양도 고스톱 모양이었던 고스톱을 사랑하는 어르신께 고스톱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며 게임을 시작했다. 나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에 대해 알려주시는 게 좋으셨는지 계속 자신한테 패를 보여줘 보라 하시면서 자세히 알려주셨다. 그리고 꼭 말 끝에 절대 친구들이랑은 돈을 놓고 고스톱 치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주의를 주셨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게임을 하다가 연속해서 내가 이길 때가 있자 이게 바로 초심자의 행운인가 보다고 얘기하며 좋아했더니 어르신도 좋아하셨다. 그렇게 하나하나 알아갈 때쯤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같이 갔던 동기선생님과 치매 선생님과 어르신은 모를 만한 사실 하나가 있다. 사실 난 고스톱을 할 줄 안다. 핸드폰에 앱도 깔았던 고스톱게임. 게임 머니였지만 몇억씩 따고 좋아했던 때가 있었지. 연달아 이겼을 때 아차 싶어 다시 모른 척을 하면서 게임을 했었다. 그래도 어르신이 좋아했으니 거짓말이라도 선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습 때의 어르신들이 어제의 기억처럼 생생하게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만큼 나에게 좋았던 기억이었던 것 같다.
실습 마지막 날 어르신들이 건강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의 실습에 마침표를 찍었다.
 
내 소중한 동기. 나와 함께 실습을 나간 동기와 나의 나이차이는 무려 40살 정도였다. 이 부분이 놀랍고도 감사한 게 사실 나는 40살의 나이차이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나의 동기가 내게 해준 배려 덕분이지 않았을까. 하시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엄마가 스쳐 지나가서 더 귀여웠다. 어르신께 귀엽다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너무 귀여우셨는 걸. 힘들 때도 즐거울 때도 같이 있다 보니 지금도 가끔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언제 내가 40대, 50대, 60대, 70대의 사람들과 같이 수업을 들어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 생각해도 참 잘 선택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실습 장소에서 만난 요양보호사님들이 하나같이 20년 후에 다시 오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금은 더 해보고 싶은 거 해보다가 나중에 다시 오라고. 그때 다시 만나자고 말씀해 주셔서 마음이 찡했다. 나에게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딸 수 있게 만들어 줬던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참 소중하게 남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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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힘이 들거나. 아무것도 하기 싫거나, 무언가 시작하고 싶거나, 심심하거나' 등등 아주 다양하게도 그림 그릴 시간을 만든다.
대학교 다닐 때는 주로 아크릴이나 유화를 그렸었다. 물감을 두껍게 사용하는 걸 좋아했다. 
한 번은, 교수님께 핸디코트를 추천받아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아마도 두꺼운 물감과 같은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 같았다. 
 
자유로움. 
캔버스는 나에게 세상에 없는 어떤 것도 표현 가능한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어느 날엔 아무것도 그려져있지 않은 캔버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고민이나 걱정들을 하얀 캔버스에 묻었다.
 
나는 미완성의 그림들도 좋아했다.
진행 중이란 느낌은 그림의 끝을 나만의 상상으로 완성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은 또 그런 모습을 보고, 살짝만 더 하면 완성될 텐데 라는 말을 흘려서 두고 가시기도 하셨다.
언제나 완성은 해뒀었지만 그래도 난 그 중간의 시간들이 참 좋았다.
아무도 바라볼 수 없는,
이 그림에 담긴 끝을 볼 수 있는 게 오로지 나 혼자였던 그 시간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캔버스가 생각보다 무거운 걸 알고 있을까?
사실 물감이 하나도 칠해져 있지 않은 캔버스의 무게는 처음엔 그렇게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다.
들고 갈 수 있는 적당한 크기를 선택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적당히 들만 한데? 이 정도는 들 수 있지."라는 당당함.
그 당당함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그날의 나의 체력에게 달려있다.
화방을 나와 학교로 걸어가는 중간쯤, 두 팔이 후들 후들 거림을 느낀다. 바람이 불 땐 내 두 손에 힘도 들어가야 한다.
오르막 길, 그냥 여기서 그림 그릴까란 생각도 막연하지만 잠깐 해봤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게 재미있었다.
 
요즘의 나는 아이패드에 그림을 그린다. 
세상은 참 좋아졌다. 물론 좋아진 기능을 사용하려면 상응하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공짜는 없지.
난 나를 사랑하는 자기애를 외면하지 않고 프로로 샀다. 좋은 선택이었다.
태블릿에서 구매한 그림 어플에는 다양한 붓의 질감을 표현할 수 있는 브러쉬들이 한가득 있다. 원하면 더 추가할 수도 있다.
그래도 물감의 두께는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던 두께감을 그 비싼 공간에서는 만들 수 없다.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을 좋아한다. 작가들의 붓터치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한번 가면 못해도 3시간은 둘러보다 나오는 것 같다. 집중하는 시간이 남들보다 좋은게 확실하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은 집중의 한계가 오는 순간, 갑자기 내 허리를 빡 하고 때리는 것 같이 순간에 다가온다.
인간은 왜 허리가 아픈 걸까.
 
나에게 평생 그림그릴 거라 했던 교수님이 가끔 생각난다.
그때 당시엔 이걸로 돈을 어떻게 버나, 작가가 그렇게 가난하게 산다던데 란 생각밖에 안 들었었다.
아마도 그때는 그림이 나에게 1순위가 될 수는 없었나 보다.
교수님은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했을까? 문득문득 아주 가끔 교수님이 기억난다. 
"아닌데요. 이젠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교수님."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오늘도 시간을 내서 간단한 그림 하나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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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시작되고 며칠 안된 어느 날.

코로나 이후로 못 갔던 목욕탕이 가보고 싶어졌다.

물론, 코로나가 함께 하는 세상이 왔다 해도 사람들은 최소한으로 있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집 근처 목욕탕 중 비교적 최신에 만들어진 곳, 사우나도 함께 할 수 있는 곳, 새벽 할인을 하는 곳. 걸어갈 수 있는 곳.

딱 한 군데가 남았다.

 

아쉽게도 코로나 전에 자주 갔던 곳이었기에 목욕탕 내부가 궁금해서 설레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만약 처음 가는 목욕탕이었다면, '탕 종류는 몇 개나 있을까.' 라거나 '목욕탕 내부는 큰가.', '내부에 한증막이 있을 까', '시설물의 노후 상태.' 등등 많은 생각을 해보며 그 전날 잠들 수 있었겠지.

 

어찌 됐든 나는 취준생, 그렇기에 새벽할인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 사실상 할인이 되면서 걸어갈 수 있는 게 가장 매력적이었다.

새벽 할인은 이른 아침 목욕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목욕탕주인의 따스한 배려.

"새벽 5시부터 8시 사이 8000원"

얼마나 매력적인 문구란 말인가. 

집에서 목욕을 할 때 찬물이 들어있는 탕과, 뜨거운 물이 들어있는 탕을 함께 쓰고 싶다는 생각을, 난 생각보다 자주 했다.

물론 생각만 했다.

왜냐면 우리 집엔 욕조가 하나만 있을 뿐만 아니라 반복해서 온도만 다른 물만 쓰고 버리다간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을 맞을 확률이 아주 높기 때문이지. 그래도 욕조가 있는 게 어디인가.

요즘엔 욕조가 없는 집들도 많다는 것을 들었을 땐, 어깨를 지지고 싶을 땐 도대체 그들이 뭘 할 수 있는지 상상을 해봤었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하던 여러 게임 중에서 목욕탕 타이쿤이란 게임이 있었다.

녹차 탕, 우유 탕, 한방 탕들을 만들어서 관리를 하는 목욕탕 주인이 되볼 수 있는 게임이었는데,

손님들이 오면 그때그때, 때도 밀어줄 수 있다. 비교적 다른 탕들을 관리하는 수고스러움보다는 아주 쉽게. 버튼 한 번씩 눌러 주고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타이쿤 속 목욕탕은 호화스러운 탕들이 가득했지.

 

꿈처럼 잠깐의 꿈들을 꾸고 번쩍, 눈을 뜨고 옷을 입고 그렇게 나는 출발했다.

새벽 5시, 캄캄한 골목을 지나, 신호등이 파란불을 켰음에도 불구하고 차가 먼저 지나가는 그 위험한 길을 지나, 나는 목욕탕에 도착했다.

조조할인을 받고 빨간색 열쇠를 받아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는 탈의실을 거쳐 수증기들 사이 초록색 물이 부글거리는 탕을 보았을 때, 전혀 잊고 살았던 그때 그 추억의 타이쿤 게임이 생각났던 것이다.

 

아주 놀랍게도 나보다 먼저 온 손님들이 있었다. 도대체 언제 온 걸까.

아침형 인간들은 생각보다 정말 많구나. 더 부지런하게 살아야지.

 

수증기가 가득한 목욕탕엔 온탕 3개, 냉탕 1개, 급냉탕 1개, 어린이 탕 1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증막 하나와 건식, 습식 사우나 실도 하나씩 있었다. 코로나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뜨끈한 온탕에서 몸을 지졌다가, 냉탕으로 바로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주로 냉탕에 들어갈 때 1박 2일의 게스트가 되어 계곡물에 들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면서 들어갔다 나온다.

그렇게 하면 1박 2일을 볼 때 계곡 입수나, 바다 입수 같은 입수게임을 할 때 더 재밌게 볼 수 있다.

냉탕에 몸을 다 담갔을 땐 당연하게도 1박 2일을 속으로 외쳐본다. "1박 2일!"

 

부자들은 아침마다 냉탕에 들어갔다 나온다던데.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최근에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간 장면이 담긴 뉴스가 순간 떠올랐다. 푸틴의 마음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니다. 표정관리가 아주 잘된 얼굴이었다. 다른 감정 이었을 것이다.

지금 내 표정은 사진으로 남겨지기엔 너무나 냉탕의 짜릿함을 가득 담고 있다.

여러모로 냉탕에서 얼굴 관리가 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왜 마약을 할까.

냉탕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이렇게 상쾌한데. 잠깐이었지만 이를 떨며 버텼던 나의 추위에 보상이라도 해주는 듯한 시원 상쾌한 이 기분.

냉탕에 갔다 나온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다.

 

 

어제 영화 "웡카"를 보고 왔다.

영화에선 다양한 능력을 가진 초콜릿들이 등장했는데, 만약 내가 초콜릿을 만들 수 있는 마법사라면 나는 냉탕의 기분을 가진 "짜릿한 새벽 폭포 초콜릿"을 만들 것이다. 

아마도 재료로는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에서 푼 눈 한 스쿱과, 번개의 빛 3조각 정도, 추가로 새벽의 공기도 좀 넣어야겠다.

그러면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김종민 씨가 입수벌칙에 당첨 됐을 때 이 초콜릿 하나만 먹어도 될 텐데.

 

어쨌든, 새벽 5시 목욕탕은 나에게 아주 기분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이 정도의 힐링이라면 2주 정도에 한 번씩은 8000원을 내고 이곳을 찾아와야겠다.

온탕 냉탕뿐만 아니라 건식 사우나와 습식 사우나도 나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어주는 좋은 공간이었다.

한 시간 반정도의 힐링 이후, 24시간 김밥나라에 가서 6000원짜리 순두부찌개를 시켰다.

이른 아침에도 사람이 꽤 많이 차 있었다. 모두 함께 아침밥을 먹으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이 시간.

고봉밥과 펄펄 끓는 순두부찌개가 등장했을 때, 점심때나, 저녁때보다 한 주걱정도 더 푼 공깃밥에서 음식점 아줌마의 사랑이 느껴졌다.

나이가 들었는지 이젠 이런 것만 봐도 눈물은 안 나지만, 뭔가 아주 살짝의 찡한 마음이 든다.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힘내길 바라는 은근한 챙겨주는 마음이 아닐까.

중간에 챙겨주신 갓 나온 뜨끈뜨끈한 계란찜 반찬 때문이었는지도.

 

목욕탕의 끝은 역시 바나나 우유지

집으로 오는 길 편의점에 들렀다. 목욕탕에서도 바나나우유를 팔았지만 2000원 이기에, 밖에 나가서 먹으면 더 싸겠지란 생각으로 룰루랄라 편의점으로 온 나는, 1800원의 바나나우유와 인사를 나눴다.

'목욕탕 아줌마, 200원만 남겨서 팔아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그 옆에 있던 2+1 서울우유를 집어 들고.

역시 어른이 된 지금, 목욕탕의 끝은 서울우유 커피우유지.

 

모처럼 든든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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