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은 냉면이다. 나는 얼음 팩을 끌어 안고 있다. 덥다. 이토록 더울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의 체감 온도 33도이다. 집에는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만 우리집은 에어컨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위를 잘 느끼고, 땀이 잘 난다는 것. 물론 다른 사람들 기준이 아닌 지극히 나의 기준에서 그렇다. 어렸을 때는 이렇게까지 더위를 느끼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렇게 까지 땀도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엇이 문제가 되었으면 지금의 상황이 되었을까 고민을 해본다. 나는 추위를 잘탄다. 추위를 잘 타면 더위는 넘어가야 이상적인게 아닌가 싶다가도 무엇이 그 기준을 정하느냐를 생각해봤을 때에 그렇게 집착할 것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렸을 때는 더위를 잘 느끼지 못했다. 그때는 더위와 추위가 공평했다. 한쪽이 강하면 한쪽은 작아졌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 두가지의 느낌을 어느 하나 부족하지 않게 공평하게 대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공평하고 싶다면 차라리 둘다 느끼지 못하는 쪽은 택할 수 없었던 것일까 한탄을 하게 된다.
우리 동네 우리 아파트 단지는 지금 엘리베이터 공사를 한다. 4월부터 9월까지의 대공사. 랜덤인 것 같은 공사 날짜가 엘리베이터에 공지되었을 때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던 모두가 조용해졌다. 3월의 선선했던 그날에 우리가 그토록 조용해졌던 이유는 별거 없었다. 무려 한 달 동안 하는 대 공사에 하필이면 가장 더울 때의 한 달이 우리 아파트가 된 것뿐이랄까. 초조하게 다가오는 공사날짜에 맞춰 물이나 쌀 등 무거울 만한 택배들을 미리미리 주문해 두었다. 그래도 한 달이면 길고도 짧은 시간이니까. 사람들도 모두가 한 마음이 된 것 같이 비슷하게 준비해 두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이 문장은 플레그였다.)"라는 생각과 함께 기다리던 엘리베이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최근 여름에 하는 엘리베이터 공사로 인해 고령의 어르신들께서 집안에서 발이 묶여 병원도 못 가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현실이 된 이 순간, 가령 어르신들 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 나이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에 속하는 데도 정말 땀이 비 오듯 하더라. 단순한 근력 운동도, 유산소 운동도 아니다. 일직선으로 이어진 계단도 아닌 이 돌고 돌아야 되는 무수한 계단은 공포로 다가오기 충분했다. 그것도 고층에 살고 있다면? 나도 이렇게 힘든데 어르신들은 정말 아찔하다. 우리 집은 17층이다. 처음부터 냉장고를 채워둘 것이 아니었다. 운동을 했어야 했다. 체력을 쌓아 뒀어야 됐다는 말이다. 생각보다 체력은 쉽게 쌓이지 않았다. 재활용을 버리러 가는 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날,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날, 외식하러 가는 날, 택배를 찾으러 가는 날, 자격증 받으러 간 날, 엄마랑 운동 가는 날. 모든 날들을 다 쌓아도 나의 체력은 그대로였고 그때마다 내 숨은 턱끝까지 차오르며 곧 죽을 사람처럼 헉헉거렸다. 이 정도면 평소에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건지 반성을 해야 될 체력이었다.
숨찬 하루하루를 보내던 우리에게 장마가 왔다.
비가 온다. = 우산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이 수식은 평소엔 간단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무서운 결괏값을 가지고 있다. 엘리베이터 공사를 하는 이 시점에선 우산을 깜빡한다면 집까지 다시 걸어 올라와 우산을 가져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장마가 시작되고 며칠 후, 누군가 인간은 진화의 동물이라 했던가. 사람들이 문 앞에 우산을 두기 시작했다.
이렇게 힘겹게 집을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는 나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무런 짐을 들고 올라오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인생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집을 나간 사람 = 집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운반할 사람
참 웃긴 게 막상 나가면 책임감이 생겨서 뭐라도 사서 오게 된다. 내가 가족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이 기회에 알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직해진 두 손에서 가족의 사랑을 느꼈다면 이제 다시 현실과 마주해야 할 때. 13층까지 정도를 올라가면 가족의 사랑이든 뭐든 다 내려 두고 오로지 내 몸 하나만이라도 집으로 던지고 싶다. 힘겹게 집에 들어간 후엔 가족들의 손길이 느껴진다. 내가 아닌 내가 가져온 나의 사랑(보통 먹을 거)으로.
택배와 배달과도 거리를 두게 되는데(우리는 이때 하필이면 캐리어가 망가져서 두 번이나 캐리어를 받아야 했다.) 원래부터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에 대해 차이가 컸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왜 이렇게 배달음식이 땡기고 사고 싶어지는 게 많아질까. 그래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음식점 대부분 가서 먹는 게 배달해서 먹는 음식 값보다 싸다. 배달비를 내니까 가격이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던 우리는 거의 500원에서 1000원 차이가 나는 가격을 보고 배달의 민족과 요기요를 등지게 되었다. 포장에서도 가게에서 포장하는 가격이랑 앱에서 할인받고 주문하는 가격이랑 다르더라. 아마도 수수료 때문이겠지라는 생각에서도 예전에 보였던 동네 배달북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 기회에 배달을 끊고 직접 가서 포장해 오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우리가 얼마나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살았었나에 대해서도 고찰해 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공사를 통한 또 한 가지의 순기능, 바로 주민들과 꽤 자주 볼 기회가 생긴다. 적어도 도착지점이 나의 가는 길 사이에 있거나 나의 도착지점보다 위라면 우리는 함께 걷는다. 물론 아무 말도 없이 걷기도 하지만 보통 그 순간의 마음은 같다. 너 마음이 내 마음이다 보니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묻는 질문 "몇 층 가세요."는 대답으로 들려올 그곳이 어디든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기 충분한 근본의 힘이 된다. 아이들과도 자주 만날 수 있는데 함께 가진 못한다. 워낙 체력이 달라서일까. 날쌘돌이도 이런 날쌘돌이가 없다. 환한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하염없이 나의 젊은 날이 그리워 질 정도였다. 순수한 아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도착지점에서 나를 기다려 준다. 힘내라는 응원과 함께 밝은 인사를 하고 뿌듯하게 집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정말 귀여우면서도 그들의 체력이 너무 부럽다. 중간 중간의 층 사이에 쉬어가라는 의자가 하나씩 있는데 여기서도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이곳에 앉아 숨 좀 쉬었다가 갈지, 지친 나의 멱살을 잡고 집에 올라가서 쉴지. 나는 거의 이중인격이 된 것 같이 번뇌에 빠진다. 처음에는 보일 때마다 쉬어보았다. 한결 편하긴 하지만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늘어졌다. 땅만 보고 쉬지 않고 올라간 날은 4분 만에 도착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체력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시간으로 한 시간을 쏟아야 했다. 적당히 쉬다가 적당히 올라가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언제나 순기능만 있을 순 없는 이 상황에서 사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순간은 택배도, 배달도, 약속이 있는 날도 아닌 누군가의 담배 타임이다. 흡연. 우리 가족은 아무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 덕에 담배냄새에 정말 예민하다. 그리고 일단 간접 흡연으로도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 다는 것이 가장 별로다. 니코틴이 주는 행복을 느끼지도 못한 채 암에 한걸음 다가가야 된다니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순간이란 말인가. 모든 암의 첫 번째 원인이 되는 것이 흡연이다. 담배는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 어느 정도였든지 금연을 하는 그 순간부터 몸에 반응이 긍정적으로 온다. 그런 담배. 관리 사무소에서 가끔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한다. 세대 내의 흡연으로 인해 많은 민원이 발생하니 화장실이나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 것을 권유하는 내용의 방송. 하지만 엘리베이터 공사가 시작되고 담배냄새는 하루를 멀다하고 하루에도 3,4번씩 집안을 가득 채웠다. 물론 그들이 이해는 간다. 담배를 피기 위해 오르락 내리락 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럼 그냥 시간대를 정해서 방송을 해줬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 시간에 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고 있는 게 나을 것 같다. 담배는 왜 태워야 될까. 그냥 씹어 먹는 사탕이나 껌으로 개발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권리는 참 답이 없는 것 같다. 나의 권리가 있다면 상대방의 권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함께 협력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더 나은 방향을 찾아 끊임없이 탐구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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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에 대해서 신기한 상황도 있었다.
어느 날은 3시부터 6시까지 거의 30분에 한 번씩 담배냄새가 나길래, 처음에는 짜증이 났지만 연거푸 나니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담배를 찾게 될 상황이면 담배를 피울게 아니라 울어야 되는 거 아닌가. 본 적도 없는 누군가가 걱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 이 정도면 인류애가 꽤 있는 것 같기도.
아무쪼록 엘리베이터 공사가 하루 빨리 끝나서 안전하게 새롭게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그동안 너무 엘리베이터에 대해 감사함을 못 느꼈던 것 같다.
엘리베이터 공사가 끝나면 물론 아쉬운 부분도 생기겠지만 이번 기회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감사함을 알아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 그리고 이번 기회에 살면서 볼일 없었던 스티커를 만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가 들어 있는 벽에 붙어 있는 스티커.
무슨 의미인지는 갤럭시 서클투 서치로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잘 모르겠다. 대충 주의하라는 경고 스티커가 아닐까 예측해 본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있는 버스 안, 문득 나의 dap에서 늘어진 것 같은 반주가 시작되었다. 유명한 영화 ost였는데 원래 노래가 이렇게 늘어졌었나. 반정도 듣고 있는 순간 갑자기 슬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준비돼있지 않은 순간에 혹시나 내가 울게 될까 봐 날을 잡아 혼자 있는 날에 펑펑 울고 슬픔이란 감정을 닫아버린다. 최근에 울었던 적이 너무 예전이었을까. 요즘 부쩍 눈물이 튀어나오려 하는 순간들이 늘고 있다.
내가 슬퍼졌던 이유는 이렇다. 인생이 한곡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면 모두가 정박의 노래가 자신의 노래일지 그대는 확신할 수 있는가. 어쩌면 정박의 노래 사이에서도 가끔은 늘어지는 순간도 있지 않을까. 잘못된 노래 가사는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이상함이 없지 않은 그런 노래 가락이 귓가에 흘러나온다 생각해 본다면. 나는 과연 어떤 감정을 우선순위로 느끼게 될 것인가. 고요한 적막으로 나의 노래를 곱씹어 볼 것인지, 위태롭다는 감정이 느껴질지, 이것 또한 나의 인생이다 받아들일지, 노래 가사가 나오기도 전에 음악을 꺼버릴지,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무엇을 느끼겠는가.
한곡의 노래의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누군가는 노래의 평균의 시간을 계산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행동이 의미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여나 나의 노래가 3분 정도 흘러갔을 때 평균의 시간 속에서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안심하게 해 줄 요소정도일까.
나의 인생. 나의 날들. 나의 세상의 노래는 몇 분 정도가 적당할까. 나는 아마 수차례 시작지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어쩌면 수차례 지금의 이 순간을 나의 음악의 끝으로 선택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음악이 다 완성되지 않은 이 순간을 마지막으로 한다면 영원히 미완성된 곡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미완성의 곡이 완성된 노래보다 가치가 있을 확률은 어느 정도 될까. 억지로 마무리된 노래와 도입부부터 끌렸지만 완성되지 않은 노래. 이 두 가지의 노래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선택할 노래는 무엇일까?
내 선택은 이렇다. 나는 두 노래 모두 안 들을 것 같다. 그렇지만 노래가 꼭 누군가에게 들려야만 가치가 있을까. 그렇게 세상이 우리의 존재에 대해 감상할 선택권을 줘야 할까. 미완성된 노래도, 억지로 완성이 된 노래도 노래를 만든 그들의 용기로 만들어진 노래인데 말이다.
모두의 노래가 어떠한 장르를 선택할지는 노래를 만드는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이겠지만, 우리의 모두의 노래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슬픔만 남아있는 곡만은 되지 않길 바란다.
꼬깃한 종이 쪼가리가 바지 주머니에서 나오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버리기에 아주 당연한 행동처럼 연결되는 순간에 나는 문득 종이를 펼쳐본다. 지금으로부터 어느 정도 지난 어느 날에 내가 방문했던 곳의 흔적이 담겨있는 종이 쪼가리. 바로 영수증이다. 일상에서 영수증이란 존재는 언제나 태어나기도 전에, 그러니까 출력되기도 전에 버려드릴까요를 먼저 듣는 존재.
난 그런 영수증을 언제나 받아온다. 물론 계산이 정확하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용도로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받은 즉시 몇 번 접어 주머니에 넣는 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받아오는 이유는 딱히 없다. 오히려 그런 영수증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옷에서 빼내어 테이블에 올려두는데 그럴 때마다 쓰레기를 들고 온 기분이 들 때가 대부분이다.
어느 날에는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영수증 하나를 발견했던 적이 있다. 오래된 책이 노래지듯 노랗게 변한 영수증 안에는 4년 정도 지난 어느 날 내가 어느 동네에서 사 먹은 순댓국이 적혀있었다. 여름인 계절 8월의 어느 날, 오후 7시쯤 사 먹었던 어느 누구인지 모를 2명과 함께 순대만 들어간 순댓국 하나와 그냥 순댓국 두 개가 주문되어 있는 영수증.
난 이 영수증을 보며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억에도 없는 어느 과거의 정확한 시간대의 내가 사용한 금액과 물건의 이름. 위치 또한 찍혀있어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가 볼 수 있는 공간. 잊고 있던 나의 과거의 어느 하루가 일기처럼 출력되어 있는 종이 한 장. 이런 영수증들 사이엔 아마도 다양한 나의 과거들이 출력되어 있겠지. 어느 날의 기쁨이 있다면 어느 날의 슬픔도 존재할 것이고, 또 어느 날은 다시 만나지 못할 어떠한 인연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시간이란 게 참 신기하다. 정말 행복했던 사람들과의 순간에서도 단 2년만 지났을 뿐인데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던 어느 날의 내가 아무에게도 티 내지 않기 위해 들어갔던 문구점에서 한참을 돌고 돌아 사서 갔던 작은 물건이, 고작 1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내 앞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당시의 슬픈 감정은 언제 사라졌을까 싶은 채 그냥 물건이 되어 다른 물건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저 물건처럼.
사진과 다른 느낌으로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특정 공간이 적혀있는 과거를 회상해 볼 수 있는 존재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존재의 유무를 선택하는 게 아닐까 싶다.
두부가 들기름을 만난다면 무적의 두부가 된다. 어색한 사람이 있다면 들기름에 부친 두부를 주며 친해져 보자.
단백질을 대표하는 고기. 그 옆에 두부는 사실 딱히 고기보다 맛있지는 않다. "고기 먹을래, 두부 먹을래"를 묻는 이상한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두부에게 들기름을 만나게 해 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들기름에 구운 두부는 그만큼 강하다.
들기름에 누워있는 두부의 마음은 얼마나 편할까. "이제 내가 최고다."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테니.
나는 두부가 부럽다. 나도 나를 더 최고로 보여줄 나만의 무언가가 있을 텐데.
때로는 그런 걸 나 대신 누가 찾아줬으면 좋겠다.
며칠 전 가족들과 변산을 다녀왔다. 영화 변산에서 박정민 배우가 "내 고향 변산은 보여줄 것이 노을 밖에 없네."라는 말로 기억되는 변산은 서울에서 꽤 먼 곳에 있다. 그 먼 길에서는 독수리와 매도 있었고, 커다란 날개를 쭉 펴고 한 바퀴 돌고 있는 모습에선 이유 없는 자유로움도 느껴졌다.
채석강을 처음 보았다. 암석들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는 절벽은 얼마나 오랜 시간들이 이곳에서 흘러갔는지 느껴졌다.
나는 '힘이 들거나. 아무것도 하기 싫거나, 무언가 시작하고 싶거나, 심심하거나' 등등 아주 다양하게도 그림 그릴 시간을 만든다. 대학교 다닐 때는 주로 아크릴이나 유화를 그렸었다. 물감을 두껍게 사용하는 걸 좋아했다. 한 번은, 교수님께 핸디코트를 추천받아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아마도 두꺼운 물감과 같은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 같았다.
자유로움. 캔버스는 나에게 세상에 없는 어떤 것도 표현 가능한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어느 날엔 아무것도 그려져있지 않은 캔버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고민이나 걱정들을 하얀 캔버스에 묻었다.
나는 미완성의 그림들도 좋아했다. 진행 중이란 느낌은 그림의 끝을 나만의 상상으로 완성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은 또 그런 모습을 보고, 살짝만 더 하면 완성될 텐데 라는 말을 흘려서 두고 가시기도 하셨다. 언제나 완성은 해뒀었지만 그래도 난 그 중간의 시간들이 참 좋았다. 아무도 바라볼 수 없는, 이 그림에 담긴 끝을 볼 수 있는 게 오로지 나 혼자였던 그 시간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캔버스가 생각보다 무거운 걸 알고 있을까? 사실 물감이 하나도 칠해져 있지 않은 캔버스의 무게는 처음엔 그렇게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다. 들고 갈 수 있는 적당한 크기를 선택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적당히 들만 한데? 이 정도는 들 수 있지."라는 당당함. 그 당당함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그날의 나의 체력에게 달려있다. 화방을 나와 학교로 걸어가는 중간쯤, 두 팔이 후들 후들 거림을 느낀다. 바람이 불 땐 내 두 손에 힘도 들어가야 한다. 오르막 길, 그냥 여기서 그림 그릴까란 생각도 막연하지만 잠깐 해봤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게 재미있었다.
요즘의 나는 아이패드에 그림을 그린다. 세상은 참 좋아졌다. 물론 좋아진 기능을 사용하려면 상응하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공짜는 없지. 난 나를 사랑하는 자기애를 외면하지 않고 프로로 샀다. 좋은 선택이었다. 태블릿에서 구매한 그림 어플에는 다양한 붓의 질감을 표현할 수 있는 브러쉬들이 한가득 있다. 원하면 더 추가할 수도 있다. 그래도 물감의 두께는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던 두께감을 그 비싼 공간에서는 만들 수 없다.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을 좋아한다. 작가들의 붓터치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한번 가면 못해도 3시간은 둘러보다 나오는 것 같다. 집중하는 시간이 남들보다 좋은게 확실하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은 집중의 한계가 오는 순간, 갑자기 내 허리를 빡 하고 때리는 것 같이 순간에 다가온다. 인간은 왜 허리가 아픈 걸까.
나에게 평생 그림그릴 거라 했던 교수님이 가끔 생각난다. 그때 당시엔 이걸로 돈을 어떻게 버나, 작가가 그렇게 가난하게 산다던데 란 생각밖에 안 들었었다. 아마도 그때는 그림이 나에게 1순위가 될 수는 없었나 보다. 교수님은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했을까? 문득문득 아주 가끔 교수님이 기억난다. "아닌데요. 이젠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교수님."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오늘도 시간을 내서 간단한 그림 하나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