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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스타그램 아이디 : limsoopsoop_the_human)

 
며칠 전 탐색 탭에 올라온 인스타그램에서 흥미로운 글귀를 읽었다. 
 
"삶이 나에게 제안되었고 
내 이름이 나에게 전해졌고 
내 몸이 나에게 강요되었다. 
 
태어나는 것은 나에게 일어나 일이고 
사는 것은 나를 차지하는 일이고 
죽는 것은 나를 끝내는 일이다." 
 
잠깐의 시간 동안 이 구절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내가 꽤나 많은 시간 동안 그 생각 속에서 머물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이 문장들은 그날의 나의 시간들을 멈추게 하였을까. 
한 문장, 한 문장 모든 단어가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귀는 정말 오랜만에 본 것 같았다. 
 
삶은 나에게 제안이 된 것이 맞다. 선택을 할 수 있기에 그것은 나의 답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내 이름 또한 나에게 전달된 것이 맞다. 내가 개명을 하지 않는 이상 내가 태어나고 나를 사랑하던, 사랑하지 않던 그 어떤 이의 생각에게서 내게로 온 것이 맞으니까. 
내 몸은 나에게 강요된 것이 맞다. 내가 선택한 육체는 아니기에. 나름 이후에 내 의지에 따라서 개발시킬 수는 있겠지. 
태어나는 것은 나에게 맨 처음 발생한 일이다. 그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다. 
사는 것은 나를 온전하게 유지시키는 일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나는 나를 차지할 수 있다. 
죽는 것은 사는 것의 반대로 나를 더 이상 이 세상의 존재로 남겨두지 않는 일이다. 그렇게 나의 끝을 결정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이 자살이라는 단어라는 것을 알고 잠깐 고민했다. 
이 책을 구매를 하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오해를 줄 수 있고(가령, 사랑하는 사람.) 또 누군가에게는 깊은 어딘가에 눌러둔 생각들이 생각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나에게 보통의 독서 시간은 이동 중일 때가 많다.)  
하지만 이런 구절을 생각하는 작가의 생각이 너무 궁금해졌다. 무릇 책이라 함은 어느 정도의 양이 있지 않은가. 작가의 생각을 더 많이 읽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구매하였고, 완독 한 후에도 내가 선택했던 책 중 가장 좋아할 책이 될 것이란 것을 알았다. 
 
책을 펼치고 차례를 넘기면 "작가에 대하여"라는 짧은 내용이 나오는데 나는 이 내용을 읽고 작가가 이 책을 마지막으로 삶을 끝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삶이란 왜 이토록 허무한 것일 까. 나는 그저 작가의 생각이 궁금했고, 그와 대면할 수는 없어도 그의 생각과는 대면할 수 있을 것이라, 단순히 그렇게 대화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의 죽음은 이 책을 통해 나와 그의 대면이 아닌, 나와 죽음과의 대면을 완성시켰다. 그는 이것을 원했던 것일까? 
 
책의 내용은 내가 처음 빠져버렸던 글귀들과 동일하게 매력적인 그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어느 구절에서는 그를 만났고, 어느 구절에서는 나를 만났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나에게 질문을 했고, 나는 그 허상이 남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한참의 생각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나름의 답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의 대답을 듣고 있을지, 그대로 떠났을지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그가 남기고 간 이 얇은 책 안에서 그를 찾을 뿐이다. 
 
걸음의 허망함을 아는 그의 하루는 얼마나 무거웠기에 그의 하루들이 쌓여 천천히 그를 떠나게 만들었던 것일까. 
탐색하고 계획하고, 기록하고 설명을 찾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 
비틀거려도 세상을 걷고, 여전히 숨을 쉬고, 마시고, 그렇게 무력해지지 말고, 적어도 그가 알던 행복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죽음보다 큰 삶에 대한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나는 65년생인 작가에게 적어도 편지라도 남길 수 있는 독자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감히 어떠한 첨언은 할 수 없겠지만, 남겨진 자들은 떠난 자들을 어쩔 수 없이 그리워한다.
떠밀리는 세상이 아니라 살고 싶다는 욕구가 남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한 문장이 써지는 것과 달리 현실은 참 쉽지 않다. 
 
책에는 짧은 삼행시 모음이 나온다. 이 삼행시를 쓰고 있을 때 그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지는 알지 못해도, 그가 얼마나 삶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었을지는 느낄 수 있다. 
위에서 내가 흥미로웠던 글귀도 이 삼행시들 사이에 있던 글귀였다. 여러 개의 삼행시가 있지만 그중에도 유독 끌렸던 삼행시들을 남겨둔다. 
 
 
"낮은 눈을 부시게 하고 
저녁은 나를 안정시키고 
밤은 나를 감싼다. 
 
유일한 것은 나를 놀라게 하고 
두 개 있는 것은 나를 닮았고 
세 개 있는 것은 나를 안심시킨다. 
 
시간은 나에게 부족하고 
공간은 나에게 충분하고 
공허는 나를 끌어 당긴다. 
 
테두리는 나의 마음을 끌고 
구멍은 나를 삼키고 
바닥은 나를 겁먹게 한다. 
 
출발은 나를 기쁘게 하고 
이동은 나를 우둔하게 만들고 
도착은 나를 소생시킨다. 
 
아는 것은 나를 성장시키고 
모르는 것은 나를 파괴하고 
잊는 것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행복은 나를 선행하고 
슬픔은 나를 뒤따르고 
죽음은 나를 기다린다." 
 
 
 
 
옮긴이의 글을 보면 이 책에서 나오는 너는 그의 친구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친구는 자살했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그 친구와 동일하게 그 또한 자살했다. 책에서는 너와 내가 동일시되는 부분이 나오는데 나는 이 부분을 통해 이 책의 죽음이 누구의 죽음일지, 혹은 책에서 나오는 데로 나의 죽음일지 고민하게 된다. 너와 나는 어느 순간 그 의미가 중요해지지 않는다. 
편집자는 말한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의 삶에 의해 쓰였다. 누군가의 삶이 누군가의 죽음에 의해 쓰였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읽는다." 
이 말이 이 책의 모든 상황을 이야기해 준다. 나는 그저 누군가일 뿐이다. 
 
작가의 다른 책인 "자화상"에 대해서 읽어봐야 이 책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 싶은데 절판이다. 중고 서점을 노려봐야겠다. 그도 아니면 프랑스어를 배워야 하는 것인가. 

책의 두께는 얇다. 하지만 무거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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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집에 상실의 시대라는 책이 있었다. 웬 사람의 실루엣만이 있는 뭐랄까 그 당시엔 약간의 음침한 기분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당시에 내 나이는 꽤 어렸고 그때도 역시나 재미없는 책에 대해 읽는 것을 싫어했던 나였기에 초반부정도까지 읽고 더 이상 읽지 않았던 책으로 기억된다. 
 
최근 어느 서점에 가도 초록색과 빨간색의 껍데기에 덮여진채로 한 곳 전체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집에 이 책이 있다는 것을 까먹고 노르웨이의 숲으로 다시 사온 나의 가족 덕에 서재에서 찾아볼 필요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필요도 없었다.
 
1월 1일이 된 날, 오늘은 이 책을 다 읽어 보겠노라 마음먹고 책장을 펼쳤다. 
역시나 나이가 들고 다시 선택한 책이라 해서 나에게 다른 감정으로 다가올 리 없는 책이었다.
처음 80쪽까지는 여전히 흥미가 없었고 반절정도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의문을 남겼고, 마지막까지 도달했을 때는 첫 장에서 나왔던 그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의 친구들과 다를 바 없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 길을 잃은 줄 알았을 것이다.
 
주인공 근처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어린 나이의 주인공에게 아마도 이 부분의 무게는 꽤 크게 다가왔을 것이라 생각된다. 주인공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비슷한 듯 다른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주인공보다 더 불안정한 상태이다. 서로가 처음 사건이 일어났던 그 순간 이후로 두 번 다시 안 봤다면 이 책의 이야기는 달라졌을 까.
둘은 서로를 의지하고 슬픔을 잊으려는 듯 노력하며 세상을 산다. 그리고 서로를, 어쩌면 한쪽에서는 사랑이라 인지한다.
과연 그들은 사랑이었을 까. 내가 생각하기엔 소중했던 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서 생긴 비어있는 감정이 가져다준 불안정감 같다. 안정적이지 않기에 서로를 의지하고 그렇기에 더 소중한 느낌. 난 사실 이 책의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보다는 상실의 시대가 더 어울린다 생각한다. 마치 책의 제목처럼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 같았으니까.
 
나오코는 슬픈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소중하게 생각했을 사람을 둘이나 잃었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가장 불안정한 사람으로 나온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토록 불안정한 생각을 하는 것일까. 감정에 파도같이 쓸려 자신을 가두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 사람의 주변 인물들은 행복하려 해도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 단정 지었다.(이후에 나오는 레이코를 통해 나오코라는 사람으로 치유를 얻은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꽤나 노력을 하지만 결국 그녀는 삶을 살아가기보다 삶의 일부인 죽음을 선택한다. 레이코에게 옷을 주겠다는 쪽지 하나만을 남긴 채 그녀는 떠났다. 나오코는 레이코가 삶을 살아가길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살아갈 때 입을 옷을 남긴 게 아닐까. 확실히 나오코는 레이코에게 치유를 주었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보다는 강한 사람이다. 살아가기 위해 답을 찾고 극복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그의 룸메이트인 특공대 이야기가 나온다. 와타나베는 자신의 유머를 위해 거리낌 없이 룸메이트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지 사람을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소재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쾌했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특공대에게 어디선가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을 가졌다. 와타나베는 스스로가 나가사와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 둘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여자와 관계를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게 바로 청춘이다 뭐 그런 느낌의 하루키의 생각이 담겨 있는 것 같았지만, 둘 다 사랑 없이 관계를 하는 부분에서 별다른 문제를 못 찾는다.(이후에는 찾게 되는 것 같지만.) 이것저것 생각하면 더 있겠지만 와타나베가 단점만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에게도 장점이 있다. 나는 불안정한 사람에 대해 사실 쉽게 놓을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꽤 빠르게 스며들기에 나였다면 나오코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뒤로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에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녀의 언니, 그녀의 남자친구 기즈키처럼 그녀를 두고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곁에 없을 때도 시시콜콜한 자신의 모든 이야기들을 편지로 보낸다. 나오코에게 끊임없이 삶에 대해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책내용은 와타나베의 편지 내용과 함께 그날그날의 기록처럼 쓰여 있다. 그래서 다른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은 오로지 내가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이 책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한다. 그저 남아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다 다르게 살아갈 뿐이다. 
이 책을 읽는 중에 기즈키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는 왜 죽기 전에 "오늘은 지기 싫었거든."을 말했을 까. 지극히 일상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한낱 게임에서 그러지 말고, 진짜 필요했을 자신한테나 지지 말지.
죽음에게 가로채이기 전에 지지 말고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어쩌면 이 책에서 나오는 몇몇의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오코의 생각도 궁금했다.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참 이기적이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거라면, 기억은 커녕 그저 희미한 존재로 향의 연기 처럼 사라졌어야 됐을 것 같다.
맞다. 솔직히 나는 이 커플이 싫다.
 
나는 이 책이 필독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글귀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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