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있는 버스 안, 문득 나의 dap에서 늘어진 것 같은 반주가 시작되었다. 유명한 영화 ost였는데 원래 노래가 이렇게 늘어졌었나. 반정도 듣고 있는 순간 갑자기 슬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준비돼있지 않은 순간에 혹시나 내가 울게 될까 봐 날을 잡아 혼자 있는 날에 펑펑 울고 슬픔이란 감정을 닫아버린다. 최근에 울었던 적이 너무 예전이었을까. 요즘 부쩍 눈물이 튀어나오려 하는 순간들이 늘고 있다.
내가 슬퍼졌던 이유는 이렇다. 인생이 한곡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면 모두가 정박의 노래가 자신의 노래일지 그대는 확신할 수 있는가. 어쩌면 정박의 노래 사이에서도 가끔은 늘어지는 순간도 있지 않을까. 잘못된 노래 가사는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이상함이 없지 않은 그런 노래 가락이 귓가에 흘러나온다 생각해 본다면. 나는 과연 어떤 감정을 우선순위로 느끼게 될 것인가. 고요한 적막으로 나의 노래를 곱씹어 볼 것인지, 위태롭다는 감정이 느껴질지, 이것 또한 나의 인생이다 받아들일지, 노래 가사가 나오기도 전에 음악을 꺼버릴지,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무엇을 느끼겠는가.
한곡의 노래의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누군가는 노래의 평균의 시간을 계산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행동이 의미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여나 나의 노래가 3분 정도 흘러갔을 때 평균의 시간 속에서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안심하게 해 줄 요소정도일까.
나의 인생. 나의 날들. 나의 세상의 노래는 몇 분 정도가 적당할까. 나는 아마 수차례 시작지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어쩌면 수차례 지금의 이 순간을 나의 음악의 끝으로 선택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음악이 다 완성되지 않은 이 순간을 마지막으로 한다면 영원히 미완성된 곡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미완성의 곡이 완성된 노래보다 가치가 있을 확률은 어느 정도 될까. 억지로 마무리된 노래와 도입부부터 끌렸지만 완성되지 않은 노래. 이 두 가지의 노래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선택할 노래는 무엇일까?
내 선택은 이렇다. 나는 두 노래 모두 안 들을 것 같다. 그렇지만 노래가 꼭 누군가에게 들려야만 가치가 있을까. 그렇게 세상이 우리의 존재에 대해 감상할 선택권을 줘야 할까. 미완성된 노래도, 억지로 완성이 된 노래도 노래를 만든 그들의 용기로 만들어진 노래인데 말이다.
모두의 노래가 어떠한 장르를 선택할지는 노래를 만드는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이겠지만, 우리의 모두의 노래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슬픔만 남아있는 곡만은 되지 않길 바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주 놀랍도록 다양하고 깊은 꿈들을 꾸고 있다. 그 덕에 어느 정도 크고 난 후로는 재밌었던 꿈같은 경우는 메모장에 적어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블랙베리 휴대폰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블랙베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망가지지도 않길래 많은 꿈들을 그곳에 저장해 두었었는데 어느 날, 정품 충전기를 못 찾겠어서 같은 타입의 다른 충전기로 충전을 했다가 더 이상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끔찍한 현실을 마주했었다. 그때 제일 속상했던 것이 바로 백업되지 않은 나의 수많은 꿈들이었다. 물론 이제는 갤럭시를 사용하고 있다.)
꿈이란 게 참 신기하게도 꿈에서 막 깨어났을 때까지는 여러 씬들로 분리되어 있을지 언정 흐릿하게 기억은 난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마치 없어져야 할 데이터인 것처럼 빠르게 기억에서 없어져 버린다. 나는 그게 너무 안타깝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들보다 재미있던 나의 꿈들이 오직 단 한 명의 관람객만 남겨둔 상태로 마치 알츠하이머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기억으로 바뀌는 순간의 허망함을 아는 가.
오늘도 역시나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일어나자 마자 생각했다. 이 꿈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내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꿈속의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주 단순한 의문이 꿈에서 깨고 꿈을 기억하기 전, 첫 번째 우선순위가 되어 궁금증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던 그 모든 순간들의 나는 몽유병이라도 있지 않는 이상 당연히 누워서 잠을 자고 있을 것 이다. 그렇다면 나의 꿈속의 나도 내가 현실에서 깨어있을 동안 잠들어 있는 것일까. 나의 꿈은 다양했다. 같은 장르로 묶이는 꿈들도 있었지만, 전혀 다른 장르의 꿈도 꾼다. 좋은 건지 나쁜건지는 몰라도 유쾌한 꿈들은 거의 없긴 했다. 그래도 현실이 유쾌하니 딱히 상관은 없다. 그 다양한 꿈에서의 나의 시점으로 들어가 본다면, 보통 마지막 꿈에서 깨는 순간의 나는 다급하거나,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심리적으로 불안함이 극도로 치달았을 때, 또는 무언가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마주하기 직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 꿈속에서 깨어나는 행동이 바람직 한 행동일까. 그 안에 있던 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내 꿈에서 두번 세 번 같은 공간이 나오는 상황은 거의 드물다. 아주 드물어도 간혹 있긴 한데 , 만약 단 한번 꾸는 내용의 꿈이라면 나는 영원히 내가 깨어나기 바로 직전의 그 순간, 그 공간 안에서 영원한 잠에 빠져 있는 걸까.
오늘 내가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있던 공간은, 돌담이 많은 마을에 있는 작은 성당같이 생긴 학교 담장 밑 누군가에 의해 숨겨져 있던 관속이였다. 잠깐씩 관 뚜껑을 살짝 들어 밖에 상황을 살피던 순간이었는데,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다. 한 낮이었고, 나는 땀을 많이 흘렸었고, 밖에선 선선한 바람이 불어 내가 뚜껑을 열 때마다 시원하게 들어왔다. 그렇게 그곳에서 느꼈던 모든 감각도 생생한 채로 나는 현실로 깨어났다. 그렇다면 꿈속의 나는 그 관 안에서 자고 있는 것일까. 내가 다시 그 꿈으로 가지 않는 이상 아마도 나는 그곳에서 죽을 것이다. 마침 숨겨져 있던 관속이었기에,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었기에 백골이 될 때까지 발견을 못 할 수도 있다. 어쩌다 발견이 된다 해도 별다른 수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사건은 종결되겠지. 이게 과연 꿈속의 내 입장이 되어도 이해할 수 있는 결말일까.
꿈에서 꿈이란 것을 인지하는 즉시 꿈속의 모든 사람들이 인지한 그사람에 대해 외부인을 본 것 같이 뚫어져라 쳐다본다 했던 이야기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만약 현실에서 우리 중 누군가가 "이거 꿈속이네."라고 한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에게 관심이나 줄 것인가. 아마도 아주 이상한 눈으로 잠깐 쳐다보고 다시 자신이 하던 행동을 마무리 질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아주 잠깐 쳐다보던 그 찰나의 순간이 꿈속에서 꿈을 인지한 사람이 느꼈을 그 순간이라면 어떨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 처럼 나는 때때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서 잠을 잔다. 그런데도 그 잠 안에서 꾸어질 또 다른 현실에게서, 다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꿈에서 깨어나 원래의 현실로 돌아오는 상황이라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있는 공간이 어디라 해도 당장에 벗어나고 싶은 생각보다 더 나은 결과를 향한 생각을 해보는게 맞을 것 같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계속 벗어나려고 회피하기만 한다면 꿈도, 현실도 내가 깨어있을 공간은 없을 것 같기에, 적어도 그 공간 안에 있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결말을 만들어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는 산타를 믿는다. 그렇기에 크리스마스를 매년 기다리고, 어딘가에서 산타는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 확신하며 나름대로의 크리스마스를 즐긴다. 12월에 만나는 나의 주변 친구들에게는 몇 개의 초콜릿과 크리스마스를 기념할 만한 오브젝트를 준비해서 선물 꾸러미를 만들어 선물해 준다. 마치 산타의 조수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드는데, 내가 그런 선물을 준비하는 이유는 선물을 받는 모두가 나처럼 설레는 크리스마스를 보내길 바라는 마음이다. 친구들에게 설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겠다는 그 기쁜 마음은 어느덧 12월이 시작되는 첫날부터 대외비로 비밀리에 진행되는,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선물 리스트를 작성하고 은밀하게 주문하여 포장까지 완료하는 행동으로 연결된다. 선물을 받는 친구들 중 어느 몇 명은 나에게 크리스마스 편지를 준비해 주는데, 봉투에서부터 크리스마스가 가득 담겨있는 편지를 받아 든 그 순간 딱 이런 기분이 든다. 온갖 연기를 뚫고 굴뚝으로 나온 직후, 산타클로스를 위해 준비해 둔 알록달록한 버터 쿠키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그렇게 12월이 끝나고 산타의 계절 같은 겨울이 지나갈 때쯤, 과연 산타는 나머지 계절을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겨울엔 눈사람도 만들고, 썰매도 타고, 키우는 루돌프들에게 각소금도 주면서 산책도 할 테고, 조수들이라고 있는 엘프라거나 요정들이라거나 그 누가 되었든, 조수들과도 함께 이번 시즌의 선물들은 어떤 걸로 구성할 건지, 선물 받을 아이들의 착함 기준치에 대해 토론을 하던지, 나쁜 애들도 구제방안이 있어야겠다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할 것 같다. 시즌이 끝난 나머지 계절엔 과연 그들은 무얼 하면서 살 것인가.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 예전에 생각해 본 걸 간단하게 말하자면 행정구역 별로 시의원처럼 산타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이 정년퇴임하기 전에 자신을 이을 산타를 찾아 키운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들을 해본 적이 있었다. 산타가 되고자 하는 산타 지망생들을 손수 골라 장학금을 주며 최우수 산타로 키워내는 육성시스템. 자신을 이을 산타를 찾지 못한다면 영원히 퇴직할 수 없는 끔찍한 노동의 현장을 생각한다면, 산타들은 계절과 상관없이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후임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다 산타가 되겠다 생각했던 초기의 마음을 저버리고 타락해 버리는 순간이 온다면 그 산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생각에선 나름 타락한 산타들에 대해 몇 가지 갱생 루트를 생각을 해봤었는데, 대략 3개 정도였다. 우선 타락 산타들이 가장 처음에 해야 할 일은 선물 포장이다. 타락한 마음으로 선물을 전해주는 행동도 어쩌면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에 더 이상 아이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선물 공장에 박혀 오로지 선물만 하루 종일 포장만 하며 단순한 일만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다. 물론 조수라고 생각했던 포장 전문직들과 함께 해야 하기에 눈치 보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약간은 정신적으로 힘들 수도 있겠다. 그다음은 빨래하기. 선물 포장을 하면서 내가 왜 타락했을까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면 "빨래하기"는 감사함을 느껴보는 시간이다. 타락하지만 않았어도 빨래를 할 필요도 없었을 상태에서 주구 장창 내가 입지도 않은, 내가 신지도 않은, 내가 쓰지도 않은 빨래만 해야 하는 상황이 놓인다면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산타 하면 생각나는 그들의 전용 출구는 바로 굴뚝. 지금은 다른 출구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산타의 옷은 새것 같은 빨간색으로 보여야 하기에 빨래는 필수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닐 산타들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발냄새가 날 것 같은 기분이다.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발냄새로 깨우고 싶지 않다면 양말도 꼭 빨아서 신어야 될 테니 빨래는 필수랄까. 또 루돌프를 생각해 보자. 루돌프가 아무리 산타가 키우는 애완동물이라 해도 야생의 냄새는 어쩔 수 없이 날 테고 그런 루돌프에게 선물을 실어 나르려면 각소금을 얼마나 주면서 꼬드겨야 할지 아찔하다. 바쁜 산타의 입장에서 각소금을 줄 때마다 장갑을 빼고 줄리는 없을 테고, 아마 장갑엔 루돌프 침이 한가득 묻어있을 것이다. 그런 장갑으로 아이들의 선물을 들고 있기엔 청결이 별로일 것 같지 않은 가. 그래서 쉴 새 없이 빨래를 하고 있을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마지막은 아이들과 사진 찍어주기. 크리스마스 시즌에 산타 복장을 하고 백화점이나 놀이공원이나 언제나 가짜 산타가 등장한다. 난 그들을 보면서 어쩌면 진짜 산타들이 숨어 있진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주면서 호호호 웃고 있는 산타들을 보며 저 중에 진짜 타락산타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게 사실 제일 힘들 것 같다. 가뜩이나 타락한 마음이 한가득인데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봐왔을 아이들과 함께 사진 찍어주기라니, 하루라도 표정관리가 안되면 타락 증거자료로 바로 쓰일 수 있는 사진으로도 남을 테고 말 그대로 감정 노동이기에 가장 끔찍한 행동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렇기에 타락 산타들이 다시 산타로 복귀하기 전 마지막으로 반드시 수행해야 되는 행동이랄까. 이 정도까지 하면 다시 산타로 복귀하기엔 충분할 것 같다.
뭐 어쨌든 생각보다 산타라는 지위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딱 한 명만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수히 많을 것 같지도 않다. 무수히 많은 산타가 있다면 내가 크리스마스에 가족들 말고 진짜 산타에게 선물을 단 한 개도 못 받을 정도로 인생을 막살진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엄청나게 바빠서 아직 못 찾아온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태어날 때부터 내 눈이 언제까지 사용 가능한지가 정해져 있게 태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갑작스러운 사고라도 나지 않는 경우 외에 내가 볼 수 있는 시간의 유효기간. 태어난 시간부터의 기준으로 죽을 때까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제한되는 그런 생각!
우선 태어났을 때 부터 생각을 해보자.
나의 아이가 과연 얼마나 세상을 보고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아마도 손가락, 발가락 개수보다 먼저 확인하는 상황이 올 것 같다. 타인에 비해 기간이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눈의 유효기간이기에 병원에선 이 시간에 따라 축하의 말도, 유감의 말도 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이 길든 적든, 부모의 얼굴을 아주 잠깐 보여주고, 아이의 눈을 곧장 검은 천으로 가리고 신생아실로 옮겨둘 것이다. 아기의 입장에선 지금은 굳이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없는 시간일 테니.
여기서 추가로 생각할 수 있는 관점은 두 가지가 있다. 지금처럼 안구 이식이 안 되는 세상과, 현대의학이 발달해서 안구 이식이 가능한 세상.
전자의 안구 이식이 가능하지 않은 세상을 산다면, 세상사람들은 모두가 이미 눈을 감고 생활하는 습관이 들어져 있을 것이다. 눈이 필요한 직업들은 다른 직업에 비해 연봉이 하늘을 치솟는다. 세상에 태어날 때 유독 눈의 수명이 길었던 사람들이 이 자리를 꽤 차고 있다.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평범한 눈의 수명을 가진 사람들도 제법 이 일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다른 직업에 비해 눈의 수명이 끝났을 경우 보상해 주는 케어 서비스도 잘 돼있기에 일하는 사람이 부족하진 않다.
계획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오늘 하루동안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세상을 볼 수 있는지 워치로 알림을 작동시켜 둔다. 일정한 시간 이상 사용이 되면 경고음 또한 들려 나온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들에서 전해져 오는 경험과, 주변의 환경에 따른 자신만의 관심의 기여에 따라 무엇을 볼지 무엇을 포기할지를 결정한다. 안타깝게도 태어날 때부터 버려지거나, 어렸을 때 부모의 손에서 크지 못하는 아이들에겐 이러한 지식이 부족하다. 아무래도 보육원이나 관리 센터에선 부모의 사랑보단 더 관대한 제한을 둘 테니 말이다.
눈의 수명은 돈이 많은 부자에게도, 돈이 없는 거지에게도 공평하게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다르게 살 것이다. 부자들은 과정에서 필요한 확인은 타인의 눈의 수명을 사서 해결하고, 오로지 결과에서만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다. 아무래도 돈이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눈의 수명을 절약할 수 있다.
눈의 수명이 유전적인 이유일 수도 있기에, 결혼하기 전에 자신들의 유효기간이 어느 정도였는지 필수로 물어본다. 이미 그들은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이 부분에 대해 알고 시작한 경우도 있다. 누가 봐도 낮은 유효기간인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끼리의 세상을 살 수도 있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많이 내적 된 경험치를 통해 행복하게 살수도 있다. 오디오 북을 출판하여 떼돈을 벌 수도 있다랄까. 아, 이 세상엔 더 이상 책을 눈으로 읽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졌다. 허세로도 보일지 모르는 행동이기에 오디오 북으로 만들어져있지 않은 책들로만 어쩌다 가끔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기억하기 위해, 여행 간 공간에서의 추억을 위해, 학교의 입학식이나 졸업식같이 새로운 시작을 위해, 마지막의 끝맺음을 위해, 계절의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등등. 다양한 이유로 자신에게 남은 눈의 유효기간을 사용한다. 예전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는데 이제는 사치 중에 사치적인 행동일 뿐이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사진을 많이 찍어 둔다는 것. 몇몇의 사람들은 눈의 유효기간이 거의 남지 않았을 때 그동안 찍어뒀던 사진을 본다. 앞으로 더 이상 못 볼 자신을 위해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순간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또 몇몇은 이제 곧 수명이 끝나가는 입장에서 아직 눈의 수명이 남아있을 때 그동안 찍어 뒀던 사진을 본다. 그리웠을 추억들이나, 좋았던 기억이 담긴 사진들을 보며 자신의 마지막 남은 시간들을 정리한다. 물론 동영상 또한 남겨두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대로 찍혀 있는 것은 드물다. 처음과 끝만 확인하였기에 중간에 카메라가 움직였다면 그 상태로 찍혀있기 때문이다. 시간도 여유롭지 않다.
아,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겐 형벌이 더 가혹해졌다. 형이 정해지면 하루 9시간의 시간은 반드시 눈을 뜨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칫 유효기간이 적은 사람이라면 교도소에서 유효기간을 다 쓰고 나오는 경우도 존재했다. 아무래도 세상이 변하다 보니 범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사람들이 시위를 통해 주장했던 내용인데, 범죄자들의 인권을 참작해 교도소 내부에서 하루 9시간의 사회봉사를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이 시위를 통해 재정된 법은 세상에 이득이 되긴 했다. 예비 범죄자들에게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최소한 한 번의 브레이크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교도소 내에서 9시간의 사회봉사를 한다 해서 형벌에서 차감되는 방식도 아니라 범죄율은 감소했고, 재범률 또한 더 낮아졌다. 나쁘지 않은 결과다.
후자인 안구 이식이 가능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들로만 가득 차오르는 상황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아마도 역시나 이미 눈을 감고 사는 세상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자들과 범죄자들은 다르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소중한 순간, 부모들은 아이의 눈의 유효기간을 의사보다, 간호사보다 빠르게 확인하고자 원할 것이다. "부디 적지도 많지도 않은 평범한 기간이여라."라고 기도하면서 말이다.
아이의 눈의 유효기간이 긴 경우, 수많은 곳에서 부모의 핸드폰으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전화가 온다. 사람들은 당장 그 눈을 사고 싶다는 말들 뿐, 아이의 건강엔 관심이 없다. 아이의 눈 수명은 누구나 노릴 수밖에 없는 빨간 문신 같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병원들은 태어난 모든 아이들의 눈 유효기간을 태어나자마자 스폰받고 있는 비밀리스트에 업데이트시켜 둔다. 국가는 이러한 문제들 속에서 산모가 충분한 회복을 할 수 있도록 1년 정도의 안전 가옥을 제공한다. 하지만 1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그럼에도 그나마 괜찮은 건 아이의 눈이 아직 작기에 완벽한 타깃이 되지는 않는다.
사람의 안구도 크기가 맞아야 이식을 해도 이질감이 없기에 보통은 연령대가 비슷한 사람의 안구를 많이 선호한다. 이런 경우 때문에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범죄가 바로 납치와 유괴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태어나자마자 눈의 수명도 아껴야 하는 이 시기에 범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 성인의 경우는 납치나 유괴 이후 안구만 적출되고 살아서 돌아오는 경우가 있지만, 아이들의 경우는 실종으로 넘어간다. 보통 더 이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을 정도로 성장한 아이들이 이 경우에 해당하는데 눈을 가리고 필요한 연령대가 될 때까지 키워졌다가 안구 적출 후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에서 운영되는 안구센터도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죽기 전 아직 수명이 남은 눈들을 저장, 혹은 기증받아 따로 관리하는 센터이다. 보통은 가족들에게 이식이 되는 경우도 많지만 자신들의 눈에 아직 유효기간이 남아있을 때, 안구관리 비용을 내고 최대 5년까지 안구센터에 안구를 저장해 둘 수 있다. 기증되어 있는 안구일 경우는 대기를 통해 이식을 받을 수 있다. 물론 비용도 들지만, 기증된 안구의 수에 비해 대기 번호가 워낙 길어서 대기자로 걸어둔 상태였다가 사망했을 경우 자식에 한해서 대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들만 한 가득이지만, 오히려 긍정적인 생각도 할 수 있는 시대다.
안구이식이 가능하다는 의학의 발전은 동물의 눈에서도 유전자 변형을 통해 안구를 만들어 내거나 이식시킬 수 있는 세상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외형적으로 안구를 선택해서 교체하는 상황도 올 수 있다.
"오드아이가 되고 싶다면 역시 여기! 500가지가 넘는 색상을 보유하고 있습니다."라는 광고와 함께 안구쇼핑센터가 세워졌다. 더 이상 이 세상엔 시각장애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의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안구의 비용은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금액대로 떨여졌으며, 그마저도 과열화 되어있다. 이미 안구이식 수술 또한 단순화되어 센터에서 구매한 안구를 그 자리에서 교체가 가능하며, 내년부턴 개인이 직접 교체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찌라시도 돌고 있다. 이제는 안구를 들고 다니면서 시력에 따라 빛에 따라 바꿔 끼울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이다. 더 이상 안경과 선글라스, 렌즈들은 사용되지 않는다. 아주 극 소수의 어떤 이들은 아직도 안경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단순히 클래식한 분위기를 좋아하거나, 안경을 쓴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생각보다 재밌는 상상의 시간이었다. 상황에 따라 더 생각해 보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중간중간 그만 멈췄던 것 같다.
마지막에 생각해 본 긍정적인 미래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더 이상 이 세상인 시각장애인이 존재하지 않는다."인 것 같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한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며 오늘의 상상은 여기까지 해본다.